지난 1996 애틀랜타올림픽서 기계체조 남자 도마 부문 1차 시기를 마친 여홍철은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최고점수 9.837점, 한국 기계체조 사상 첫 금메달이 사정권 안에 들어오는 점수였다.
그러나 2차시기, 있는 힘껏 달려 도약한 후 자신의 주특기였던 쿠에르보 더블 턴(여2, 두바퀴 반 비틀어 뛰기)를 시도한 여홍철은 고질적 문제로 지적받았던 착지 불안을 노출하며 세발이나 뒤로 밀려나갔다. 엄청난 실수였다.
그럼에도 채점이 끝난 후 그의 이름은 알렉세이 네모프(러시아, 9.787점)에 이어 2번째에 자리했다. 통한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은메달을 목에 걸게 된 셈이다. 그러나 여홍철은 한참이나 고개를 들지 못하고 아쉬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후로도 여홍철은 끝내 착지 불안의 늪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한국 기계체조의 전설을 써내려간 그도 이루지 못한 꿈이 바로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한국 기계체조는 1984년 LA올림픽 단체전 출전 이후 단 한 번도 금메달을 따내지 못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과 2004년 아테네올림픽, 그리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거치며 은메달과 동메달은 목에 걸었지만 금메달에 대한 갈망은 해소되지 못했다. 그야말로 숙원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오랜 갈망에 대한 금빛 해갈을 꿈꾸는 남자 체조계가 양학선(20, 한국체대)을 주목하는 이유다. 아직 어린 양학선이 '한국 체조의 희망'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2010년 로테르담 세계선수권 대회. 처녀출전이었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양학선은 단숨에 4위를 차지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고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놀랄 만한 연기를 펼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양학선의 금빛 행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양학선은 지난 해 일본에서 열린 2011 세계 기계체조선수권대회에서 유옥렬 이후 처음으로 도마 부문 금메달을 목에 걸며 올림픽을 향한 첫 발을 뗐다.
▲ 양학선, 양1, 그리고 여홍철
160cm의 작은 키를 장점으로 살릴 수 있는 도마에 매달린 양학선은 뛰어난 순발력에 더해 올림픽 제패를 위한 자신만의 신기술을 개발해냈다. 바로 '여2'에서 반바퀴를 더 도는 '양1(정식 명칭 Yang Hak Seon)'이다.
"여홍철 교수님이 했던 여2에서 반 바퀴를 더 트는 기술인데, 핸드스프링 동작에서 앞으로 한바퀴를 도는 과정에서 옆으로 180도를 더 도는 그런 기술이에요".
지난 27일 태릉선수촌에서 열린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양학선은 자신의 신기술을 이렇게 소개했다. 종전 국제대회 최고 난이도 기술(7.0점)을 가볍게 뛰어넘는 난이도 7.4점의 고난이도 기술로 인정 받은 양1은 양학선이 작은 체구 안에 숨기고 있는 최대의 무기다.
바로 이 양1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기반을 제공한 여홍철(41) 경희대 교수는 이날 넘치는 자신감과 위축되지 않는 자신만만함, 실력과 신기술까지 갖춘 어린 후배를 응원하기 위해 태릉선수촌을 찾았다. "부족하겠지만 (양)학선이한테 기를 불어넣어주려 왔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린 여홍철 교수는 전남체고(현 광주체고) 직속 후배이기도 한 양학선을 애정어린 눈빛으로 지켜봐온 대부같은 존재기도 하다.
▲ 4초를 위해 4년을 준비해야 하는 가혹한 종목
"체조는 단 4초를 위해 4년을 준비해야 하는 종목이에요. 1초에 1년씩 쓴다고 할 수 있죠. 아무리 열심히 준비해도 4초면 끝나는 그 긴장감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아주 중요합니다".
여홍철 교수는 4초의 긴장감을 강조했다. 모든 종목이 그렇지만 단 한 순간의 실수도 결코 용납되지 않는 체조의 가혹함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겪었던 만큼 그의 충고에는 진심이 녹아들어 있었다.
"금메달이라는 것이 실력만을 가지고 딸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보면 신의 선물이라고도 할 수 있죠"라며 올림픽의 얄궂은 속성을 꼬집은 여홍철 교수는 컨디션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컨디션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자신만의 방법으로 컨디션을 조절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한 여홍철 교수는 "코치나 감독과 그 방법에 있어 의견 차이가 날 경우 미리 조절해두는 것이 중요하다. 본인의 컨디션을 중심으로 방법을 강구해나가는 것이 좋고, 의견 차이가 있을 경우에는 2, 3일 남겨두고 상의를 통해 타협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 스무 살의 양학선, '마지막 올림픽'이라는 각오로
"스무 살이든 서른 살이든 선수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이게 내 마지막 올림픽이 될 수도 있다, 다음 올림픽에 또 출전할 수 없을 수도 있다 하는 그런 생각이요".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어린 선수지만 양학선은 올림픽을 향하는 각오를 다부지게 전했다. "마지막 올림픽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겠다"는 양학선의 각오를 여홍철 교수에게 전하자 그는 빙그레 웃음을 띠며 십분 이해한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최정상의 기량을 자랑하는 선수에게도 시련과 고난이 닥칠 수 있다. 올림픽 출전은 떼 논 당상처럼 여겨지는 선수라도 부상이나 컨디션 난조, 국제대회의 규정 변화 등 다양한 변수가 발목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감이 넘치는 상태에서 최고의 기량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가 곧 자신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도전에 임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
여홍철 교수는 앞날이 창창한 후배에 대해 애정과 신뢰, 그리고 진심어린 충고를 듬뿍 전했다. "워낙 비틀기 기술이 좋고 높이가 있어서 뛰어난 선수기 때문에 금메달을 딸 것 같다"며 후배를 칭찬한 여홍철 교수는 양학선을 '더 성장할 수 있는 선수'라고 평가했다.
"학선이는 성장하려면 더욱 더 성장할 수 있는 선수에요. (국제대회)한 번 뛰어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고 만족해서는 안 되고 더 잘하려고 해야 합니다. 항상 실수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돼요".
한국 기계체조의 역사를 써내려갔던 '전설' 여홍철 교수는 새로운 전설의 서막을 앞두고 있는 '신성' 양학선에 대해 아낌 없는 기대와 믿음을 보였다. 런던올림픽 개막을 불과 한 달도 채 남겨두지 않은 지금, 여홍철의 기대처럼 힘차게 도약해 날아오를 양학선의 '양1'이 한국 체조의 금빛 갈증을 해소해주길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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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학선을 격려해주기 위해 태릉선수촌을 찾은 여홍철 교수 / 태릉=지형준 기자 jpnews@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