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영화, 그 중에서도 집단 감염을 소재로 한 한국영화는 흔치 않다. 최근 '인류멸망보고서'의 좀비들은 그렇기에 그 존재만으로도 의미를 지니기에 충분했다. 이런 상황에서 살인기생충 '연가시'를 소재로 한 한국형 재난영화가 탄생해 관심을 모은다. 전염병은 아니지만 변종 연가시의 집단 감염에 걸린 사람들의 모습은 그렇기에 등장만으로도 새롭고 신선하다. 유일하게 주인공들 중 감염자 역을 소화한 여배우도 눈길을 끈다.
영화 '연가시'(감독 박정우, 7월 5일 개봉)는 치사율 100%의 변종 연가시가 대한민국을 초토화시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뼈와 살가죽만 흉측하게 남는 참혹한 몰골의 변사체들이 전국 방방곡곡의 하천에서 발견되는 가운데, 일에 치여 가족들을 챙기지 못했던 제약회사 영업사원 재혁(김명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내 경순(문정희)과 아이들이 연가시에 감염 됐다는 것을 알게 된다.
김명민, 문정희, 김동완, 이하늬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이 중 감염자는 여배우 문정희 한 명이다. 나머지 인물들은 감염된 문정희와 그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뭉치고 고군분투한다.

이 같은 한국영화 장르물에서 감염자 연기를 하기란 쉽지 않다. 참고할 전례를 많이 찾아볼 수 없는 것도 그렇고, 상상력에 의지해 감독과 함께 만들어내야 하는 부분이 크기 때문이다. '연가시'같은 경우는 감염증세가 극도의 구갈(口渴) 증세라 '물 마시는 연기'가 관건이다. 여기에 경순 캐릭터는 '모성'의 결합이라 더욱 드라마틱하다.
문정희는 27일 오후 서울 안국동의 한 음식점에서 열린 '연가시' 미디어데이에서 "벌컥벌컥 물이 들어가는데 입 뿐 아니라 코로도 들어가 눈과 그 주위가 붓고 빨개지더라. 나중에는 머리가 너무 아파 '이대로 기절하겠구나, 죽을 수도 있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여기서 기절하면 누군가 인공호흡을 해 살려주겠지?란 생각을 했다"라고 당시의 고충에 대해 들려줬다.
영화 속에서는 감염자들이 많이 등장하나 구체적인 감염 증세와 그 과정은 문정희 한 명을 통해 드러난다. 폭식에 구갈 증상이 심해지다가 물만 보면 마시고 싶고 뛰어들고 싶은 유혹에 정신줄을 놓게 되고 결국 연가시를 번식시키며 참혹한 죽음을 맞는다. 죽음의 문턱에서 오락가락하는 경순은 위험하고 애처롭고 아슬아슬하다.
문정희는 엄청난 물을 본능적으로 맛있게(?) 들이키는 연기와 함께 참을 수 없는 유혹에 흔들리는 표정, 그리고 이를 극복해야만 하는 모습, 그 사이에서 드러내는 강렬한 모성과 주인공인 남편을 향한 절대적 믿음 등 이성과 '멘붕'을 오가는 '감염된 엄마'의 모습을 무리없이 연기해냈다. 자칫 판타지 같을 수 있는 장면들을 섬세하고 리얼하게 살려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런가하면 영화 속에는 감염자들이 집단으로 움직이는 위협적인 떼 신도 등장한다. 수용소 떼 신에서는 머리가 뜯기고 얻어 맞는 장면을 연기했다. 문정희는 "영화가 잘 나오려면 어떤 것도 감내하게 되더라"며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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