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7월 19일, 당시 OB 베어스의 2루수였던 김광수는 MBC 청룡과의 잠실경기에서 그때까지 이어오던 63경기 연속 무실책 행진을 접어야 했다. 1회초 수비 중 윤덕규(MBC)의 땅볼을 잡는 과정에서 불규칙 바운드가 일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상황을 놓고 공식기록원이 장고 끝에 실책으로 최종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땅볼타구가 마지막 바운드에서 공이 튀어 김광수의 가슴 부근에 맞고 옆으로 구른 것이었는데, 막상 기록이 실책으로 판명 나자 김광수의 무실책 기록에 초점을 맞추고 있던 언론에서는 공식기록원의 판정기준과 재량권에 대해 일제히 분석과 논평을 쏟아낸 바 있었다.
야구에 기록원이라는 직업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생소하던 시절, 세간의 시선은 공식기록원이 판정을 내리는 것은 물론이고 일부 기록규칙에 관한 재량권까지 갖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주목했는데, 자주는 아닐지라도 가끔씩 일어나곤 하는 기록원의 재량권에 대한 시비와 논란은 어디에서 촉발되고 야구적으로는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 이번 프록터의 구원승 불발 건을 계기로 그 안을 들여다보도록 한다.

공식기록원의 임무는 형태상 크게 네 가지로 대별된다. 첫 번째는 경기 상황을 약속된 숫자와 기호를 사용해 기록지에 그대로 옮겨 담는 일이다. 눈 앞에서 벌어진 사실을 가감 없이 정확하게 적어나가는 것으로 사관으로서 기록원의 가장 기본이 되는 임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 두 번째는 판정을 내리는 일이다. 타자가 타격 후 출루했을 때 안타로 출루한 것인지, 아니면 수비수의 실책으로 출루한 것인지에 대한 최종판정을 내린다. 타자의 타율과 직결된 타구판정 권한은 공식기록원의 가장 대표적인 업무이다. 타구판정 외에 주자의 도루, 투수의 와일드피치와 포수의 패스트볼 구분, 실책의 책임소재 판단, 타자의 희생과 기습번트 구별 등 경기상황에 따라 벌어지는 각종 플레이에 대한 기록판정을 내린다.
세 번째는 결과로 나타나지 않은 주자들의 아웃과 세이프 타이밍을 재는 일이다. 아웃과 세이프에 관한 권한은 심판원에게만 주어져 있는 권한이지만, 실제로 루상에서 아웃과 세이프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은 상황에 대한 타이밍은 기록원들이 판단한다. 선뜻 이해가 잘 가지 않을 수 있는 내용이지만 예를 들면 아주 간단해진다. 타구를 야수가 잡다 놓치는 바람에 타자주자가 1루에 출루한 경우, 야수의 포구와 송구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가정하고 타자주자의 1루 아웃타이밍을 잰다. 여기에서 안타와 실책이 갈라진다.
또한 주자의 도루를 막기 위해 베이스커버를 들어온 야수가 송구를 놓쳤을 경우, 야수가 잡아줬을 때를 가정해 주자의 아웃타이밍을 잰다. 아웃으로 판단했다면 도루자로 기록이 되지만 세이프라고 생각했다면 도루가 된다. 희생타 판단에서도 이 원리는 적용된다.
마지막 네 번째는 재량권에 의한 판단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재량권은 기록원의 마음대로가 아닌 정해진 규정을 근간으로 하는 규칙적용을 의미한다.
야구에서 기록원에게 재량권이 주어지는 대표적인 항목은 자책점 판단과 구원승 결정에서다. 우선 자책점 판단의 경우, 한국프로야구는 1987년부터 이닝 재구성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프로 원년 이후 1986년까지는 득점 순간 자책점과 비자책점이 결정되는 일본식의 자책점 결정방식을 취했지만, 고의로 주자를 비자책점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폐해를 막고자 미국에서 채택하고 있던 이닝 재구성 방식을 원용해 사용하고 있다. 이는 득점 순간에 자책, 비자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닝이 끝난 뒤, 야수실책이나 패스트 볼에 의한 주자 진루상황을 제외하고 정상적인 타격행위에 의한 주자의 진루상황을 가정해 자책점을 결정하는 방식이다.
자책점 결정방식에 기록원의 재량권이 들어있다는 것은 재량에 따라 기록원이 주자의 진루상황을 인정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가령 이미 패스트 볼로 득점에 성공한 3루주자(실제는 없는 주자)를 루상에 있는 주자로 가정한 후, 후위 타자의 타구별 성격이나 방향에 따라 홈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자책점,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라고 판단을 했다면 비자책점으로 간주하는 방식이다. 당연 그 판단은 내규로 마련된 규정에 의거해 내려진다. 만일 그 판단이 가부간의 경계선상에 자리하면 가능한 한 투수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재량권에 의해 결정되는 또 하나의 기록범주는 구원승 결정에서 나타난다. 선발투수의 승리투수 조건은 5회(5회로 종료된 경기는 4회 이상 투구) 이상 투구로 이미 규칙에 못이 박혀 있기에 이론의 여지가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러나 상황이 각양각색으로 전개되는 구원승은 다르다. 물론 구원승 결정에도 정해진 규칙이 따로 존재하고 있는데, 그 대원칙은 리드시점을 갖고 있는 구원투수를 승리투수로 기록한다라는 것이다. 실제 대부분의 경우, 리드시점을 보유환 구원투수가 승리투수 기록을 가져가고 있다. 하지만 리드시점을 갖고 있는 투수가 없는 상태(선발투수에게 있지만 5회 이전 강판한 경우)라면 나머지 구원투수들 중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투구한 투수에게 승리투수의 기록을 부여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효과적이라는 말은 무엇일까? 그것은 투구이닝, 투구내용, 경기상황 등을 종합해 가장 효율적으로 투구한 투수를 골라내라는 말이다.
그런데 리드시점을 갖고 있는 구원투수를 승리투수로 기록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를 규칙은 따로 명시하고 있다. 즉 대원칙에서 벗어나 예외 규정을 적용해도 되는 상황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그 문구는 다음과 같다.
‘구원투수가 잠시 동안 비효과적인 투구를 하고 그 뒤에 나온 구원투수가 리드를 유지하는데 효과적인 투구를 했을 경우, 나중의 구원투수에게 승리투수를 기록한다’
이 대목은 승리투수에 관한 야구규칙 (c)항에 따라 붙어있는 예외 규정으로, 메이저리그에 적용되고 있는 규칙서에도 ‘Exception>…ineffective in a brief appearance…’라는 문구로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다만 예외 규정인 만큼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가급적 적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또한 기록의 일반적 정서이다. 그러면서도 이 예외 규정을 적용하려 한다면 이때는 기록원의 확신이 전제되어야 한다. 리드시점을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구원승을 인정하기에 현격한 결격사유가 있다는 확신이 들었을 경우에 적용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확신은 투구이닝과 실점 등의 수치를 참고로 하지만, 가장 비중을 두는 것은 현장감이다. 경기흐름, 등판시점, 아웃카운트와 볼카운트, 점수차, 주자상황, 상대타순, 남아있는 투수 등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판단을 말한다.
지난 6월 28일 넥센과 두산전(목동구장) 9회 말, 4-2 리드상황에서 등판한 구원투수 프록터(두산)가 1이닝 2실점하며 경기를 동점으로 만든 것(블론 세이브)을 빌미로 연장전상 리드시점을 갖고 있는 그를 구원승 결정에서 제외한 일은 현장의 기록원이 종합적으로 판단한 결과, 그만큼 비효과적인 투구내용으로 확신했기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가정이지만 이날 프록터의 구원승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결론적으로 주자가 있는 위기상황에서 등판했거나, 연장 10회초에 대량득점으로 나중에 등판한 구원투수 임태훈의 승리 기여 비중이 현격히 낮아졌어야 했는데 상황이 그렇질 못했다. 혹자가 지적한 블론 세이브를 기록했다는 이유 또는 1이닝 2실점의 기록 자체가 문제가 되어 구원승 결정에서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한달 전쯤인 5월 25일과 26일, 한화의 바티스타와 KIA의 박지훈은 각각 넥센과 LG전에서 2이닝 2실점과 1이닝 1실점의 블론 세이브를 기록하고도 타선과 구원투수의 도움으로 승리투수로 기록된 사례가 있는데, 경기흐름상 바티스타는 비교적 많은 투구이닝, 박지훈은 적은 실점 등의 이유가 리드시점 보유라는 절대적인 유리함을 지켜낸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지난 2000년 그간 타자의 번트자세만을 가지고 기습번트와 희생번트를 판단해오던 기록위원회는 선수와 코치, 구단 기록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자세뿐만 아니라 이닝이나 점수차, 아웃카운트 등의 경기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희생번트 여부를 판단하는 방식으로 변화를 꾀한 적이 있다. 변화하고 있는 선수들의 기량이나 작전 등을 기록에서도 규칙허용치 안에서 반영을 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애매할 수 있는 구원승 결정기준 역시도 언제부턴가 현장의 목소리는 틀에 박혔던 과거와 달리 공식기록원들에게 점진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규칙이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결과적으로 경기를 망친 구원투수들의 기득권을 지켜주기보다 문제해결의 열쇠 구실을 한 투수들을 좀더 생각해 달라는 쪽으로 말이다. 100% 일치할 수는 없겠지만 구단에서 평가하는 선수들의 고과와 공식적으로 보여지는 선수들 기록의 괴리감이 너무 크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같은 기록분야라도 성격이 달라 무조건적 반영은 힘든 일이지만 법적으로 허용된다면 가능한 한 틀에 안주하는 기록, 기록을 위한 기록, 생명력 없는 기록보다는 야구를 위한 기록, 살아 숨쉬는 기록을 지향하는 것이 좀더 발전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은 현재 진행형이다.
2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이제는 선수들의 기량을 끌어올려야 하는 임무를 맡은 코치의 신분으로 문득 1989년 그 당시 상황을 회고하던 김광수 코치는 이런 말을 남겼다.
“앞으로 한 발 들어와 바운드를 줄였어야 했는데, 기다리는 바람에 처리하지 못하게 된 거지. 내 실수지 뭐”
스스로의 안일한 대처를 자조했던 김광수 코치의 이 말은 지금은 타구판정에 관한 또 하나의 참고기준으로 기록원들의 뇌리에 살아 숨쉬고 있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
김광수 고양 원더스 코치의 2011년 두산 감독대행 시절의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