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을 훌쩍 넘긴 1949년생임에도 불구 130km에 가까운 직구와 낙차 큰 포크볼을 선보인 우완 투수 무라타 쵸지(63). 무라타는 지난 20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넥센 한일 프로야구 레전드 매치 2012'에 5회말 4번째 투수로 등장, 다이내믹한 투구폼과 쇼맨십으로 한국야구팬들을 매료시켰다.
잇따른 수비 실책 속에 2실점하며 총 38개의 볼을 던진 무라타지만 자신이 맡은 1이닝을 끝까지 책임졌다. 게다가 5회말이 끝나고 가진 '스피드킹' 특별 이벤트에도 두 말 없이 참가, 양국 레전드들은 물론 야구팬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최고 124km의 공을 뿌려 여전한 노익장을 과시했지만 생각처럼 스피드가 나오지 않자 마운드에서 좌절하는 익살스런 모습으로 지켜보는 이의 웃음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22시즌 동안 604경기 동안 3331⅓이닝 215승 177패 33세이브. 다승왕 1번을 비롯해 4번의 탈삼진, 3번의 평균자책점 타이틀이 대표적인 현역시절 기록이다. 그러나 '위키피디아'를 통해 실제 무라타의 삶을 돌아보면 영화 속에서 걸어나왔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무라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히로시마 시민구장에서 열린 야간경기를 보고 프로야구 선수를 장래 희망으로 삼았다. 타고난 스피드와 무거운 볼은 이미 후쿠야마 전파공고 시절 152~153km가 나왔다. 그러나 당시 히로시마현에는 쟁쟁한 강호들이 즐비해 고시엔 무대는 밟지 못했다.
무라타는 1967년 드래프트 1위로 도쿄 오리온스(지바 롯데 전신)에 입단했다. 에이스 번호인 '18'을 희망했지만 '29'에 만족해야 했다. 신인시절이던 1968년에는 3경기 등판에 그칠 정도로 부진했다. 파칭코, 마작 등으로 날을 새기 마련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여느 때처럼 마작 후 새벽에 기숙사로 돌아오던 무라타는 베테랑 투수 코야마 마사아키와 맞닥뜨렸다. 무라타보다 15살이 더 많았던 코야마는 통산 21시즌 동안 통산 290번의 완투경기를 펼치는 등 320승을 거둔 레전드 투수. 당시 30대 중반의 대선배 코야마가 그 이른 시각 조깅을 준비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무라타는 "재능이 있으면서 그것을 헛되게 보내는 것은 쓸쓸하지 않냐"는 말에 감격, 이후 진지하게 훈련에 임했다.
무라타는 1969년 6승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팀이 우승한 1970년에는 5승을 거뒀다. 1971년에는 또 다른 전설의 투수 가네다 마사이치(한국명 김경홍)를 만났다. 가네다는 통산 20시즌 동안 일본 역대 최다승인 400승(298패)을 거뒀다. 944경기 중 365경기를 완투로 장식했다. 무라타는 가네다의 조언을 받아들여 소위 '큰 도끼'라 불리는 지금의 투구폼으로 바꿨다. 이 해 12승으로 첫 두자리 승수를 거둔 무라타는 1974년 일본시리즈에서 헹가래 투수로 거듭났다.
1976년 포크볼을 습득, 21승을 거둔 무라타는 평균자책점 1위(1.82), 탈삼진 1위(202개)로 2관왕에 오른다. 특히 무라타는 포수의 사인대로 던지지 않는 '노사인'을 원칙으로 해 1979년까지 4년 연속 두자리수 폭투를 기록하기도 했다. 무라타는 148개의 폭투로 이 부문 역대 기록을 가지고 있다.
무라타는 1982년 프랭크 조브 박사에게 팔꿈치 인대접합 수술을 받아 1984년 막판에야 복귀했다. 당시 팔꿈치 인대접합 수술은 일본에서도 터부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85년 17승(5패)을 거두며 컴백상을 받은 무라타는 6일 로테이션으로 일요일에만 등판, '선데이 쵸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89년에는 40세의 나이로 자신의 세 번째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1990년 10승을 거둬 역대 두 번째 40대 10승 투수가 됐지만 은퇴를 결심, 그 해 10월 13일 은퇴경기에 나섰다. 무라타는 당시 은퇴경기였던 세이부전에서 5회 강우콜드 완봉승을 올렸다. 특히 함께 배터리를 이뤄왔고 은퇴를 함께 하기로 한 하카마다 히데토시를 2군에서 올려 포수로 앉히기도 했다. 사실 무라타는 당시에도 최고 145km의 직구를 뿌렸다. 하지만 사령탑으로 앉은 가네다 감독이 젊은 투수 기용을 원하면서 결단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은퇴 경기 후 상대 선수였던 기요하라 카즈히로는 세이부 선수 중 혼자 남아 무라타의 은퇴 헹가래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은퇴 후 방송 및 신문 해설자로 활약한 무라타는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다이에 호크스의 투수 코치를 맡기도 했다. 현재는 평론가로, OB 선수리그인 '마스터즈 리그'에서 뛰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일본 전역에 걸쳐 흩어져 있는 크고 작은 섬들을 돌아다니며 유소년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다.

이밖에도 무라타의 라이벌은 통산 567홈런(역대 3위)을 친 레전드 타자 가도타 히로미쓰라고. 완벽하리라 생각했던 슬라이더를 가도타가 끝내기 홈런으로 연결한 것에 쇼크를 받은 무라타는 이후 가도타를 상대로는 단 1개의 슬라이더도 던지지 않았다. 오직 직구로만 승부한 만큼 직구를 갈고 닦았고 이에 가도타 역시 무라타의 직구를 치기 위해 노력했다.
또 은퇴를 했지만 여전히 초인에 가까운 훈련을 하고 있다고 알려진 무라타다. 팔굽혀펴기 500회, 복근 운동 1000회 등이 있으며 덤벨을 오른손 집게 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으로 껴 포크볼을 던지기 위한 훈련을 하고 있다.
특히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2005년 3월에는 프로야구 OB 13명과 팀을 결성, 투수 겸 감독이 됐다. 이후 외딴섬에 있는 소년야구팀을 상대로 경기도 하고 지도도 하고 있다. 이 때 반드시 초등학생 타자를 세워 놓고 자신과 진지하게 승부를 펼쳐보인다고. 무라타는 외딴섬 소년야구교실을 개최하는 이유를 "일본에 있는 (유인)섬 수가 내가 거둔 통산 승리(215승)와 같은 정도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 무라타의 활동이 계기가 돼 2007년부터는 전국 외딴섬 교류 중학생야구대회인 일명 '외딴섬 고시엔'이 열리고 있다.
한편 무라타의 성격이 드러나는 일화가 있다. 오랜 세월 함께 배터리를 이룬 하카마다 포수가 신인이던 시절, 무라타는 "1아웃 만루. 이 때 확실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나"고 물었다. 이에 하카마다는 곧 바로 "더블 플레이"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무라타는 다시 "그럼 그 다음은?"이라고 되물었고 하카마다가 주춤거리자 웃으며 "가장 좋은 것은 삼진이다. 더블 플레이는 실책이 있다"고 말했다고.
국경을 넘어 여러 모로 귀감이 되면서도 흥미로운 레전드 투수 무라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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