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빌 샹클리 전 리버풀 감독의 명언처럼. 9년 만에 국내 무대에 복귀한 '국민타자' 이승엽(36, 삼성)은 녹슬지 않은 활약을 보여줬다.
타율 3할1푼8리(299타수 95안타) 16홈런 57타점 55득점 5도루. 그의 방망이는 뜨거웠다. 류중일 삼성 감독은 전반기가 끝날 무렵 "이승엽 효과는 엄청나게 컸다"고 엄지를 세운 뒤 "최형우가 부진할 때 주변에서 '이승엽을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어쩔 뻔 했느냐'고 하더라. 실력뿐만 아니라 이승엽의 행동 하나하나가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23일 오후 대구구장에서 만난 이승엽은 전반기를 되돌아보며 "힘들었지만 좋았다. 팀이 1등한 게 제일 기쁘다"고 운을 뗀 뒤 "내가 좋을 때 팀 성적이 좋지 않았는데 지금은 내가 좋지 않더라도 팀이 1등을 하고 있으니 좋다. 아주 재미있다"고 대답했다. "전반기 활약을 점수로 환산한다면 100점 만점에 90점"이라고 평가한 이승엽은 "큰 부상 없이 단 한 번도 1군 엔트리에서 빠지지 않았다는 건 만족스럽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부족하다. 나머지 10점이 좀 큰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승엽은 이번 달 10경기 타율 2할2푼5리(40타수 9안타) 1홈런 4타점 7득점에 불과했다. "체력적으로 매우 힘들었고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타격 밸런스가 너무 안 좋았다. 삼진도 많았다. 시즌 초반에는 삼진이 거의 없었다. 20경기 가운데 삼진 10개 미만이었는데 갑자기 삼진이 늘어났다. 그만큼 공을 보는 시야가 좁아졌다고 해야 할까. 여유도 없어졌다. 나흘간 쉬면서 생각을 바꿔 내일(24일)부터 새롭게 해보겠다. 야구는 반복 훈련이니까".
그토록 그리던 고향에 돌아온 이승엽은 홈경기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향한다. 아주 가끔 지인들과 함께 당구장에서 스트레스를 푸는 게 전부. 국내 무대에 복귀한 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이승엽은 "한 번씩 당구치고 밥을 먹는 게 전부다. 더는 가고 싶은 곳도 없고 어디 가더라도 불편하다"며 "야구 유니폼을 벗은 뒤 편히 지내고 싶어 되도록 집에서 쉬는 편"이라고 대답했다. 9년 만에 고향팀 유니폼을 입은 이승엽은 "대구에 와줘서 고맙다", "이 선수가 뛰는 모습을 다시 보게 돼 행복하다"는 팬들의 인사에 큰 힘을 얻는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는 지금 노력하는 걸로 부족하다". 그가 스파이크 끈을 조여 매는 이유 가운데 하나.

10년 전 마해영, 양준혁과 함께 삼성의 중심 타선을 이끌었던 이승엽은 "그땐 정말 대단했다"고 엄지를 세운 뒤 "당시 공격력의 비중이 아주 높았지만 지금은 투수, 수비, 기동력 등 모든 부분에서 단연 앞선다. 당시 타선에 현재의 투수, 수비력이라면 아무도 못 따라올 것"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어느덧 최고참 대열에 이른 이승엽은 최형우(29, 외야수)과 박석민(27, 내야수)에게 선배로서 경험은 전할 수 있지만 기술적인 조언은 절대 하지 않는다. "선수 대 선수로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게 그의 생각.
이승엽, 최형우, 박석민 등 삼성의 중심 타선은 16일 대구 KIA전서 올 시즌 처음으로 한꺼번에 폭발했다. 이승엽은 "그때 처음 아닌가. 앞으로 후반기에는 더 많이 나올 것이다. 타격이라는게 사이클이 있으니까 부진하면 분명히 좋은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한다. 형우가 후반기 때 훨씬 좋아져 우리 팀은 더욱 강해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승엽은 경북고 14년 후배 김상수(22, 내야수)와도 격의없이 지낸다. 권위 의식은 없다. 후배들도 너나 할 것없이 "승엽이형" 또는 "승짱 선배님"이라 부른다. "오랜만에 와서 정말 즐겁다. 그동안 이러한 분위기를 느끼지 못해 많이 그리웠다. 인프라 등 야구와 관련된 모든 조건에서 일본이 앞서지만 재미과 웃음을 줄 수 있는 곳은 여기 뿐이다. 지금의 생활에 아주 만족하고 고맙게 생각한다".
그는 팀내 규율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선후배의 엄격한 위계 질서는 불필요하다고 여긴다. "선후배간에 인사 등 최소한의 예의만 지키면 된다. 나와 상수는 14살 차이지만 그라운드에서는 선수 대 선수일 뿐이다. 나는 상수의 공을 받아야 하고 상수는 내게 공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내가 안타를 때리면 (배)영섭이(26, 외야수)가 홈으로 들어와야 한다. 똑같은 선수 대 선수다".

류 감독은 이른바 '승짱 효과'에 대해 극찬했다. 하지만 이승엽은 "내가 오랜만에 국내 무대에 복귀해 감독님께서 좋게 말씀해주셨을 뿐이다. 분명히 이야기했지만 100점 만점에 90점이더라도 나머지 10점이 너무 크게 느껴진다. 나는 만족하지 않고 가슴 한 켠에 남겨둘 것"이라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승엽이 채워야 할 10점은 무엇일까. "예전에는 경기 후반 또는 연장전 때 꼭 쳐야 겠다 할때 꼭 쳤었다. 물론 항상 칠 순 없었지만 지금 10번 가운데 1,2번에 불과하다면 그땐 10번 가운데 4,5번은 (결정타를) 쳤었다. 경기 후반에 분위기를 바꾸는 홈런 또는 안타 같은게 부족하다. 중심 타선으로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이승엽에게 후반기 목표를 묻자 "한국시리즈 2연패"이라고 힘줘 말했다. 그는 "우리 선수들이 워낙 좋으니까 이 멤버 그대로 시즌이 끝날때까지 부상을 당하지 않고 야구장 안팎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현재 자리에서 시즌을 마칠 것이라 생각한다. 류 감독님께서 항상 '자신감은 좋지만 자만심은 안된다'고 강조하셨다. 자만심을 가지지 않도록 더욱 신중하고 겸손한 플레이를 선보이겠다". 뛰어난 실력과 함께 인품까지 갖춘 이승엽다운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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