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형, 고2때 150km 던졌던 형이에요. 진짜 공 빨랐었는데".
꼭 10년 전 고교 2학년에도 불구 최고 투수 중 한 명으로 꼽혔고 일찍이 청소년 대표팀의 기둥 투수로 맹활약했다. 그 때만 해도 누구나 그의 프로무대 성공을 확신했다. 그러나 혹사 후유증에 이은 잇단 수술과 재활로 존재감이 잊혀졌고 그 와중에서 어머니마저 병마로 잃는 시련을 겪었다. 두산 베어스의 9년차 좌완 사이드암 김창훈(27)은 그 어두운 터널을 뚫고 3008일 만에 승리를 거뒀다.
김창훈은 지난 24일 잠실 LG전에 2-5로 뒤진 4회 1사 1루서 선발 임태훈(24)을 구원해 마운드에 올라 1⅔이닝 동안 피안타 없이 1사사구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때마침 두산이 5회말 대거 7득점을 올리며 9-5로 경기를 뒤집었고 덕택에 김창훈은 이날 시즌 첫 승을 거뒀다. 팀은 13-11로 승리했다.

올 시즌 16경기 1승 1홀드 평균자책점 1.38(24일 현재)로 계투진에서 맹활약 중인 김창훈은 한화 소속이던 지난 2004년 4월 29일 대전 두산전서 6⅓이닝 3피안타 2실점으로 선발승을 거둔 후 전날(23일)까지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던 바 있다. 2004년 천안 북일고를 졸업하고 한화의 1차지명(계약금 4억2000만원)으로 입단했던 김창훈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뛰어난 유망주였다.
2002년 4관왕으로 강호 면모를 보여줬던 북일고는 3학년 안영명(한화, 공익근무)-2학년 김창훈으로 대표된 좌우 에이스 구도가 확실했던 팀이다. 특히 김창훈은 그해 세계 청소년 선수권서도 유일한 2학년으로 선발되어 주축 투수 노릇을 했다. 2005년 아시아 선수권서 김광현(SK, 당시 안산공고 2학년)이 있었다면 2002년에는 김창훈이 그 역할을 맡았다.
학교는 달랐으나 1년 후배인 유희관(두산, 상무)는 "창훈이 형은 제구되는 150km도 던졌던 투수"라며 고교 시절을 돌아보았다. 동기생이자 부산고 에이스였던 장원준(롯데, 경찰청)도 "우리 또래에서는 김창훈이 최고였다. 꼭 이겨보고 싶던 투수"라고 이야기했다. 졸업 당시 김창훈의 계약금은 한화의 당시 역대 최고액이었으나 이는 3학년 시절 구속 저하로 금액이 깎인 것이었다. 김창훈은 고교 시절 메이저리그에서도 주목한 좌완 특급이었다.
그러나 졸업반 당시 김창훈의 구속 저하는 이후 프로 생활 고전의 복선과도 같았다. 2004년 4월 김창훈은 첫 한 달간 3승을 거두며 동기 송창식(한화)과 함께 신인왕 후보로도 꼽혔다. 당시 김창훈에 대해 야구인들은 "열 아홉 살인데 마치 베테랑 송진우(현 한화 코치)처럼 던진다"라고 이야기했다. 제구력을 갖췄으나 스피드가 떨어지면서 들은, 어찌보면 달갑지는 않은 이야기였다.
결국 첫 한 달간 거둔 3승은 김창훈이 한화를 위해 거둔 마지막 공헌도였다. 이후 김창훈은 팔꿈치-어깨를 잇달아 다치며 수술대에 올랐고 구속은 120km대까지 뚝 떨어졌다. "투수도 아니다"라는 구단 내부 평가가 이어지며 기대치는 급락했다. 설상가상 김창훈의 공익근무 복무 직전에는 어머니마저 병마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외동아들에게도, 신문 보급소를 운영하다 아들을 위해 생업을 포기하고 뒷바라지에 전념했던 김창훈의 아버지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2009년 11월 공익근무 막판 통보된 두산으로의 트레이드(이대수-조규수+김창훈). 두산은 당시 잊혀졌던 김창훈의 야구 센스에 주목했다. 어깨, 팔꿈치가 모두 아파 전력투구가 어려웠음에도 과감하게 공을 뿌리던 담력을 높이 샀으나 구속이 확실하게 오르지 않아 중용되지 못했다. 따라서 김창훈은 지난 시즌 오버스로에서 사이드스로로 전향했다. 원래 고교 시절 스리쿼터에 가깝게 던지던 김창훈은 구속 상승을 위해 팔 각도를 높이는 데 중점을 두었으나 기대만큼 구속이 오르지 않자 무브먼트를 살리는 쪽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결과는 괜찮다. 올 시즌 김창훈은 2군에도 다녀오는 등 부침이 있었으나 16경기 1승 1홀드 평균자책점 1.38(25일 현재)에 이닝 당 주자 출루 허용률(WHIP) 1.08, 피안타율 1할5푼9리로 나쁘지 않다. 최근에는 원포인트 릴리프 뿐만 아니라 계투 추격조로 1이닝 이상을 소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김창훈이다.
3008일 만의 승리에 대해 김창훈은 "1승이 이렇게 힘들다는 것을 새롭게 느꼈다. 내가 잘해서 한 승리가 아니라 좋은 타이밍에 좋은 모습을 보여준 팀원들의 승리라고 생각하기에 무엇보다 팀원들에게 제일 고맙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워낙 경기 내용이 긴박했던 만큼 승리에 대한 감격을 생생하게 전하지 못했다는 것이 구단 관계자의 뒷이야기다.
시즌 개막 전 김창훈은 베테랑 좌완인 류택현(LG)의 이야기를 꺼냈다. 1994년 OB(두산의 전신)에서 데뷔했으나 LG에서 뒤늦게 기량을 키우며 특급 원포인트릴리프가 된 류택현은 통산 828경기 출장으로 역대 1위 기록을 보유 중이고 통산 103홀드를 기록 중이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류택현처럼 자신도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싶다는 김창훈의 이야기였다.
"저는 다친 곳도 많아서 다른 선수들만큼 빠른 공을 던질 수 없어요. 사이드스로로 전향한 것도 공의 움직임을 높이기 위해서 선택했으니까요. 선발 에이스로 뛰기는 어려운 만큼 제 역할은 원포인트 릴리프가 되겠지요. 그래도 저는 특화된 투수니까. 그 특이점을 앞세워서 류택현 선배처럼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하고 오랫동안 팀에 공헌하고 싶습니다".
한때 그는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그러나 혹사 후유증과 수술-재활이라는 모진 풍파를 맞고 사람들의 냉대라는 발걸음에 밟히고 어머니의 별세로 꽃을 피우려던 생각조차 포기하려던 떡잎이었다. 화려한 꽃이 되지 못하더라도 그윽한 향을 내는 인동초 꽃을 피우기 위해 묵묵히 노력한 김창훈. 미-일에서도 희귀한 케이스의 좌완 사이드암 김창훈의 야구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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