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대기였다. 전 소속팀이 그의 잠재력이 터지길 기대했으나 결국 고개를 떨구고 다른 팀으로 보내고 말았다. 그런데 새 소속팀의 '4번 타자'라는 자리가 거포를 만들었다. 지난 시즌 중반 이적 후 꾸준히 중심 타선에서 출장해 온 박병호(26, 넥센 히어로즈)가 트레이드 1년이 지난 지금은 홈런-타점 부문 2관왕을 노리는 리그 굴지의 슬러거가 되었다.
박병호는 지난 1일 문학 SK전에 4번 타자 1루수로 선발 출장, 홈런만 세 개를 터뜨리며 3타수 3안타 4타점 1볼넷으로 100% 출루에 쳤다하면 홈런포로 활약했다. 팀이 4-11로 완패했으나 팀의 득점을 모두 자신의 방망이로 올린 박병호의 위력은 분명 뛰어났다. 이 홈런포들로 박병호는 2005년 데뷔 이래 첫 1경기 3홈런을 성공한 동시에 동료 강정호(19홈런)를 제치고 가장 먼저 시즌 20홈런을 달성한 동시에 홈런 단독 선두로 나섰다.
그 흔한 아홉수도 없이 SK전 2경기서 4홈런을 몰아치며 데뷔 첫 20홈런 고지까지 훌쩍 점령한 박병호. 1년 전만 해도 그가 전 소속팀이 양육을 포기하고 트레이드 협상으로 떠나보낸 선수임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2009시즌 중 LG에서 KIA로 이적해 첫 이적생 MVP로 우뚝 선 김상현(32) 못지 않은 충격파다. 박병호의 올 시즌 성적은 2할8푼9리 21홈런 72타점 10도루로 홈런-타점 부문 현재 1위다.

성남고 시절 포수로 뛰었으나 동기생 김현중(전 삼성)에 밀려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던 중 4연타석 홈런포로 고교야구를 뒤흔든 박병호는 2005년 LG의 1차지명자로 입단했다. 계약금 3억3000만원은 공격 특화형 유망주였던 그의 잠재력을 알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첫 두 시즌 1할대 타율에 그친 뒤 박병호는 상무 입대를 결정했다. 실적은 미약했으나 아직 어린 선수였던 만큼 LG의 기대감은 여전히 컸다.

상무에서 중심타자로 활약한 뒤 제대한 박병호. 2009시즌 9홈런, 2010시즌 7홈런을 때려냈으나 그 해 타율은 각각 2할1푼8리, 1할8푼8리에 불과했다. 1차지명 출신 유망주였으나 당장 성적이 급했던 LG는 매 시즌 외부에서 타자를 보강했고 상대적으로 기량이나 지명도가 낮았던 박병호의 선발 출장 기회는 그만큼 떨어졌다. 또한 한 야구인은 "박병호의 타격에 대해 주위에서 조언이 각각 달랐다. 심성 착한 박병호는 그 이야기들을 다 수용하다 결국 자기 타격을 잃어버리고는 했다"라며 안타까워했다.
2010년 6월 10일 잠실 한화전부터 13일 광주 KIA전까지 네 경기 연속 홈런포를 쏘아올리기도 했던 박병호. 그러나 이후 활약이 미진하자 박병호는 다시 벤치 멤버가 되고 2군 선수가 되었다. 설상가상 9월 17일 SK전서는 수비 도중 주자와 부딪혀 팔꿈치 인대 부상을 입고 시즌을 접은 박병호다. 수술 후 재활 중이던 박병호에게 돌아온 통보는 전지훈련 행이 아닌 국내 잔류군. 팀의 기대치가 급속도로 하락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2군 감독이던 김기태 현 LG 감독을 비롯한 잔류군 스태프가 그를 보살폈으나 말 못할 상실감은 컸다.
"팀 사정도 이해했고 제 자신도 코칭스태프들께 너무 죄송했어요. 당장 성적이 급한 팀이니까. 제가 잘 못하는 데 출장 기회를 꾸준히 부여하실 수는 없었겠지요. 다만 '여기서 못 치면 2군이다'라는 부담도 있었고. 죄송스러울 따름이지요". 지난해 7월 31일 트레이드 후 박병호는 전 소속팀 LG에 거듭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반복했다.
선배 심수창과 함께 넥센으로 옮긴 박병호. 그러나 그 해 최하위팀으로 이적했다는 것은 오히려 박병호에게는 커다란 기회였다. 힘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만큼 넥센은 박병호가 미래의 4번 타자가 될 수 있도록 기회를 꾸준히 부여했다. LG 시절 전반기 동안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박병호는 넥센 이적 후 임팩트가 큰 홈런포도 자주 보여주며 66경기 2할5푼4리 13홈런 31타점으로 시즌을 마쳤다.
"단점이 보여도 올해는 부담은 주지 않겠다. 놀 마당을 주고 뛰어놀 수 있도록 지켜보겠다. 박병호가 성공작인지 실패작인지는 올해가 아닌 다음 시즌 활약상이 결정지을 것"이라던 김시진 감독의 지난해 후반기 엄포 섞인 기대감은 현실이 되었다. 중장거리 타자인 3번 타자 이택근, 일발장타력이 뛰어난 5번 타자 주전 유격수 강정호와 함께 박병호는 'LPG 클린업'을 구축하며 전반기 넥센 돌풍을 이끌었다. 1일 경기서 패하기는 했으나 넥센의 시즌 전적은 42승 2무 42패로 SK와 공동 4위. 충분히 시즌 말엽까지 포스트시즌 진출권을 놓고 다툴만한 팀이다.
경기 전 "18호 홈런 손맛이요? 다 잊어버려서 어쩌나 싶습니다"라며 웃은 박병호는 그 이야기가 농담이었음을 3홈런으로 증명했다. 지난 6월 20일 잠실 두산전서는 6회 상대 선발 김승회의 5구 째 몰린 포크볼을 당겨 솔로포로 연결하기도 했다. 이튿날 박병호에게 홈런 당시를 묻자 그는 "낮은 직구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공을 주시했는데 높은 포크볼이었다. 공이 와서 쳤을 뿐이다"라고 답했다. LG 시절 부담감을 이기지 못해 좋은 공을 흘려보내고 나쁜 공에 배트를 휘두르던 박병호가 아니었다.
깜냥이 모자라 좋은 자리에서 감투를 발로 차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올해의 박병호처럼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경우도 자주 볼 수 있다. LG에서 확실한 자리를 만들지 못한 채 보따리 짐을 안고 넥센으로 향한 그는 어느새 없어서는 안 되는 '홈런 1위 4번 타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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