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용어 가운데 포비아(Phobia: 공포증)이라는 말이 있다. 특정 대상에 오랜 기간 자극에 노출되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지속적인 두려움을 뜻한다. 포비아를 없애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노출요법, 즉 단계적으로 극복해 가는 것이다.
야구에서 포비아는 '천적관계'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지난해까지 이대호(오릭스)에겐 정대현(SK)이 공포의 대상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타자였던 이대호, 정대현만 만나면 작아졌다. 그래서 이대호가 타석에 들어서면 경기 후반 SK는 시기적절하게 정대현을 투입하곤 했다. 하지만 이대호는 정대현을 꾸준히 상대하면서 공포증을 제거해 나갔다. 그리고 이대호는 한국에서의 마지막 해였던 지난해 6타수 3안타로 확실하게 설욕한 뒤 일본으로 진출했다.
특정 선수를 상대할 때 천적관계가 걸린다면 벤치에서 선수교체를 통해 맞대결을 피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매년 정해진 경기를 반드시 치러야 하는 정규시즌에서 특정 팀에게 번번이 밀린다면 곤란하다. 지난해까지 SK를 상대하던 롯데가 그랬다. 2000년 창단된 SK를 상대로 롯데는 11년동안 통산 83승 132패 9무, 승률 3할8푼7리로 유독 약한 모습을 보였다.

▲ 승률 3할2푼6리, 지난 5년 간 처참했던 롯데
특히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2007년 이후 롯데는 SK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다. 2007년 4승 14패로 완벽하게 밀렸고 8년 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던 2008년에도 5승 13패로 뒤졌다. 2009년엔 6승 13패, 2010년 7승 12패로 여전히 SK만 만나면 기를 못 폈다.
지난해 롯데는 간만에 승패를 비슷하게 맞췄다. 8승 10패 1무, 여전히 상대전적은 뒤졌지만 SK와의 승패마진을 -2까지 줄였다. 2007년 무려 -10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SK 포비아'에서 벗어났다고 해석할 수 있었다. 게다가 2007년부터 매년 SK전에서 1승씩 더해나간 것도 돋보였다. 단계적으로 롯데는 SK 공포증을 떨쳐버린 것이었다.
문제는 가을야구에서 나왔다. 롯데는 지난해 플레이오프에서 SK에 상대전적 2승 3패로 밀리면서 결국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창단 첫 정규시즌 2위, 그리고 플레이오프 직행으로 어느 때보다 승리에 대한 기대가 높았지만 SK의 벽을 넘어서진 못했다. 2007년부터 2011년까지 5년동안 롯데의 SK전 상대전적은 30승 62패 2무, 승률 3할2푼6리로 완벽하게 몰렸다.
▲ 쏟아지는 빗줄기 속 달성한 승리, 벌써 8승째
롯데에게 14일 사직 SK전은 정규시즌 후반기 분수령이라 할 만했다. 7월부터 한 달동안 하락세를 걷던 롯데는 8월 초 삼성을 홈으로 불러들여 위닝시리즈를 거두면서 반전 계기를 마련했다. 지난주 4연승을 달리며 다시 상승무드를 타던 3위 롯데에게 2경기 차로 추격을 시작한 4위 SK는 반드시 꺾어야 할 상대였다.
초반 분위기는 좋았다. 에이스 유먼의 호투 속에 롯데는 3회 강민호의 적시타로 앞서 나갔다. 롯데가 2-0으로 앞선 가운데 5회말 공격에서 우천으로 경기가 중단됐을 땐 행운이 따르는 듯 싶었다. 최근 불펜소모가 심했던 롯데에겐 유먼 하나로 경기를 매조짓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 하지만 51분의 기다림 끝에 경기는 재개됐고 6회에도 다시 한 번 비로 경기가 중단됐다 재개됐다.
그 와중에도 유먼은 승리요건을 채웠지만 등판을 고집했고, 결국 3루수 황재균의 실책을 곁들여 2사 만루를 채워놓고 마운드를 정대현에게 넘겼다. 그리고 정대현이 최정에게 동점 적시타를 허용하면서 분위기는 급속도로 냉각됐다. SK만 만나면 뭔가 꼬였던 예전 기억이 되살아날 판. 하지만 롯데는 이번엔 달랐다. 2-2로 맞선 7회 전준우의 결승타, 그리고 강민호의 쐐기 2타점 2루타로 승기를 굳혔다 .
이날 승리로 롯데는 SK를 상대로 8승 4패의 절대우위를 지켰다. 1년에 19번 맞대결을 벌이니 롯데가 SK전 상대전적 우위를 점하기까진 이제 남은 건 2승이다. 앞으로 7번 남은 맞대결에서 롯데는 2승만 거둔다면 년 만에 SK를 누르게 된다.
야구계에선 흔한 말로 '한 팀에 호구를 잡히면' 줄곧 끌려간다고 한다. 야구는 대표적인 멘탈 게임이다. 경기를 벌이기 전부터 불안감이 있다면 이미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동안 SK를 상대할 때 롯데가 그랬다. 올해야말로 롯데가 'SK 포비아'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절호의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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