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2일 만의 선발 등판. 4⅓이닝 5피안타 2볼넷 2탈삼진 4실점. 두드러진 활약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좋다. 마운드에 오를 수 있으니까. 주인공은 롯데 자이언츠 투수 이정민(33).
그는 18일 사직 넥센전에 선발 등판한 그는 승리를 거두지 못했지만 성공 가능성을 엿보였다. 양승호 롯데 감독은 "이정민이 잘 던졌다. 다음 경기에도 선발 투수로서 활용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19일 경기를 앞두고 기자와 만난 이정민은 "항상 컨트롤이 좋지 않다는 고정 관념이 있는데 선발과 중간은 다르다. 선발은 이닝의 여유가 있고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시작해 부담이 적다. 오랜만에 선발 등판 기회를 얻어 길게 던지는데 적응이 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했다.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오빤 선발 스타일'에 가까운 듯. 이에 이정민은 손사래를 쳤다. "모든 투수라면 선발 등판을 원한다. 현재 중간 계투 요원들도 학창 시절에는 선발 투수로 뛰었다. 프로 데뷔 후 계투 보직을 맡아 그렇다".
이정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있다. 다름 아닌 이승엽의 아시아 홈런 신기록의 희생양. 이정민은 2003년 10월 2일 대구 삼성전에 선발 등판해 2회 이승엽과의 대결에서 시즌 56호 중월 솔로 아치를 허용하고 말았다. "나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데 (이)승엽이형이 국내 무대에 복귀한 뒤 다시 한 번 회자되는 것 같다". 이정민은 "대기록의 희생양보다 승엽이형 덕분에 유명세를 타게 됐다"면서 "큰 경험을 한 뒤 더 여유가 생기고 내게 더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병역 의무를 마치고 2009년에 롯데에 복귀한 이정민은 필승조의 한 축을 맡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복귀 첫해 31경기에 등판, 1승 2패 1세이브 5홀드(평균자책점 6.67)로 두각을 드러내는 듯 했지만 2010년 1승 1홀드(평균자책점 6.67), 지난해 1홀드(평균자책점 3.72)로 하향 곡선을 그렸다. 어깨 부상 때문이었다.
지난 시즌이 끝난 뒤 김일엽(롯데 투수)과 함께 대구의 한 스포츠 클리닉에서 보강 훈련에 몰두했었다. "확실히 투수는 겨울 보강 훈련이 중요한 것 같다. 안 아파야 뭔가 보여줄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는 전훈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내가 부족해 그런 것이지만은 정말 마음이 아팠다. 절망 그 자체였다". 그렇다고 주저 앉을 순 없다. 아내와 갓 태어난 딸을 보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정민에게서 이용훈의 향기가 느껴졌다. 잇딴 부상 속에 방출 위기에 놓이기도 했던 이용훈은 지난해 9월 17일 한화 2군 경기에서 프로야구 1,2군 통틀어 사상 첫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올 시즌 전훈 명단에 극적 승선한 이용훈은 18일 현재 8승 4패 1세이브 1홀드(평균자책점 2.76)로 순항 중이다.
"용훈이형은 정말 열심히 운동했었다. 잘 될 것이라 믿었다"는 이정민은 "용훈이형이 '하나(컨트롤)를 얻기 위해 또다른 하나(스피드)를 버려야 한다'고 했었다. 그 말이 크게 와닿았다"며 "부상없이 오랫동안 뛰는 게 목표"라고 포부를 드러냈다. 1082일 만의 선발 등판. 이정민에게 새로운 시작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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