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만치서 다가오는 오르막길을 힘차게 올라 붙기 위해 있는 힘껏 가속 페달을 밟았는데, 갑자기 대형 화물차가 앞을 가로막는 바람에 한껏 받았던 탄력이 한 순간에 죽어버렸다.’ 라고 말하면 이해가 쉬울까?
8월 14일 잠실과 목동구장 경기에서 리드하고 있던 원정팀 KIA(LG에 5-2리드)와 두산(넥센에 3-0 리드)이 각각 4회말에 쏟아진 비 때문에 노게임이 선언되어 어느 정도 손아귀에 들어왔다 싶었던 승리를 목전에서 날려버린 일은 결과적으로 KIA와 두산 모두에게 적잖은 후유증을 남긴 것으로 귀결되는 모양새다.
승률 5할 언저리에서 포스트시즌 진출권인 4강행 티켓을 따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KIA는 물론, 내심 한국시리즈 직행을 위해 선두 삼성을 옥죄고 들어가던 2위 두산 모두, 어느 한 경기도 가벼이 생각할 수 없는 처지들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노게임 이후 양 팀은 나란히 연패의 늪에 빠지며 목표로 했던 4강과 정규리그 우승의 꿈에서 한 발자국씩 물러서고 있다.

그러나 음지가 있으면 양지도 있는 법. 역시 4강 다툼에서 아직은 생존을 장담하기 어려운 롯데는 같은 날인 14일 두 차례의 우천중단을 겪고도 SK를 맞아 경기를 승리로 장식, 포스트 시즌 티켓 싸움에서의 유리한 고지를 지켜냈는데 경쟁팀들의 앞길을 막고 롯데에게만 길을 열어준 이날의 하늘만큼은 완전 롯데편이었다 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옥외경기인 야구에서 비는 일단 거추장스런 존재다. 빗물은 시야를 가려 타격과 포구를 방해하고 물 묻은 공은 악송구를 유발한다. 또한 땅을 질척거리게 만들어 야수의 수비와 주자의 주루를 어렵게 만든다. 여기에 관전하는 사람의 불편도 빼놓을 수 없다. 흠뻑 젖은 의자도 그렇고 옷가지도 개운치가 않다. 설령 비가 그쳤다 해도 그라운드를 재정비하기까지 인내심으로 기다려야 하고 그 동안의 무료함도 감수해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모든 일들을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지붕이 없는 노천 상태에서 일어나는 자연현상들은 사람의 의지로 어쩌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규칙서에도 여기저기 우천시에 관한 조치를 담은 조항들이 넘쳐난다. 야구경기의 뼈대라 할 수 있는 정식경기와 노게임에 관한 규정을 기본으로 강우콜드게임에 관한 내용이 그렇고, 일시정지경기에 따른 내용과 조치가 모두 비와 연관된 규칙들이다.
그간 비는 프로야구 정사와 야사에 수많은 뒷 이야기를 남겨왔다. 모두 4차례의 비로 인한 일시정지게임을 비롯, 1982년 5월 동대문구장에서 열린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야간경기를 노게임으로 묶었고, 2009년 6월 KIA와 히어로즈의 목동경기에서는 무려 5방의 홈런을 무효로 만들었었다. 2007년 6월 대전 KIA전에서 만루홈런을 때리고도 없었던 일이 되어버렸던 한화의 이영우, 2000년 5월 대구 롯데전에서 기록한 연타석 홈런이 비에 씻긴 삼성의 김기태도 비가 몰고 온 불운에 씁쓸함을 곱씹어야 했던 대표적인 기억들이다.
여기에 비로 인해 경기가 중간에 콜드게임으로 끝나버리는 통에 미처 경기에 나설 기회를 잡지 못해 애지중지 이어오던 연속경기 출장기록을 반강제적으로 손에서 내려놓아야 했던 2008년 이범호(615경기, 당시 한화)와 2010년 이대형(353경기, LG)의 아픔도 잊지 못할 비에 관한 기억이다.
또한 1987년 8월 대전구장의 빙그레-삼성전은 우천으로 경기가 무려 116분(2차례 중단)이나 중단되어 지금까지 최장시간 중단경기로 남아있으며, 1993년 5월 박동희(롯데)가 기록한 비공인 노히트노런(6회 강우콜드게임) 역시도 비가 만들어낸 쭉정이 기록으로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한편 비는 경기기록의 결과뿐만 아니라 경기상황 때문에 벌어지는 돌발적인 장면들을 우리 앞에 가끔 끌어다 놓을 때도 있다.
8월 16일 사직구장에서 열렸던 롯데와 SK의 연장 10회말, 5-6으로 한 점 뒤지고 있던 롯데가 절호의 역전기회라 할 수 있었던 1사 만루에서 갑작스레 퍼붓는 비로 심판진이 경기 중단을 선언하려 하자, 부리나케 달려 나와 경기 중단조치에 관해 격하게 항의하던 롯데 양승호 감독의 낯선 모습은 비가 만들어낸 절박함이었다.
규칙적으로 연장 10회초에 원정팀 SK가 리드하는 점수를 뽑았기 때문에 설령 롯데의 10회말 공격을 더 이상 진행시킬 수 없다고 해도 훗날 일시정지게임으로 계속 이어 경기를 마쳐야 하므로 롯데로서는 급할 것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 순간의 돌발 폭우는 이론적으로 앞뒤를 따질만한 마음의 여유를 앗아가기에 너무도 충분한 블랙홀이었다.
이렇듯 비는 야구에 있어서 여러 가지로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자연 소재이다. 많은 야구팬들의 커다란 소망인 돔 구장 건설이 현실화되면 비는 어쩔 수 없이 야구에 작별을 고할 수 밖에 없지만, 우천 세레모니 등 비가 가져다 주는 잔잔한 재미와 비에 얽혀 일어날 수 있는 인간미 넘친 야구이야기들도 함께 사라진다는 점에서 조금은 아쉬울 것 같기도 하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