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자이언츠 우완 이정민(33)은 한때 최고의 유망주였다. 2002년 데뷔한 이정민은 150km를 넘나드는 빠른 공을 던지며 큰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이정민은 2005년 6승 7패 7세이브 4홀드 평균자책점 3.82를 기록한 게 최고의 성적이었다.
이정민은 2010년 20경기에 출전했지만 2011년은 9경기, 작년은 6경기에 출전한 게 전부였다. 점점 1군보다 2군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고, 올 시즌 역시 2군에서 시작했다. 6월 초 투수 공백으로 1군에 올라왔지만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채 2경기에만 나왔고, 다시 2군에 내려갔다.
8월 초 1군에 올라온 이정민은 달라져 있었다. 7일 사직 LG전에서 9회 1사 후 등판, 2⅓이닝을 1실점(비자책점)으로 호투를 펼쳤고 덕분에 양승호 감독의 눈에 들었다. 그리고 고원준이 2군에 내려가며 생긴 선발진 1자리에 들어갈 기회를 얻었다. 넥센과의 18일 사직경기에서 이정민은 선발로 등판, 4⅓이닝 5피안타 4실점을 기록했다. 비록 실점은 있었지만 4회까진 무실점으로 잘 던져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 감독의 믿음에 보답한 역투
28일 문학 SK전 선발로 예고됐던 이정민은 태풍으로 경기가 연기되며 등판 기회가 무산되나 싶었다. 하지만 양 감독은 29일 선발로 그대로 이정민을 내보냈다. "이정민도 베테랑 선수 아닌가. 자기가 5이닝을 책임지고 싶다는 말을 한 걸로 안다. 그렇게 책임감을 보여 줬으니 믿고 내보낼 것"이라는 게 양 감독의 말이었다.
이정민은 이날 경기에서 8이닝 9피안타 6탈삼진 1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되면서 감독의 기대에 완벽하게 보답했다. 팀의 10-1 완승, 2위를 지켜낸 값진 호투였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완벽한 투구였다. 직구 최고구속은 148km까지 나왔고, 직구 비중을 70% 이상 가져가는 등 힘을 앞세운 피칭을 했다. 호투를 가능하게 했던 건 완벽한 제구력이었다. 한 가운데 몰린 공이 단 하나도 없을 정도로 이정민은 완벽한 코너워크를 선보였다.
특히 좌타자를 상대로 과감한 몸쪽 승부가 돋보였다. 4회 2사 1루에서 박정권을 상대로 몸쪽 스트라이크를 꽂아 루킹 삼진을 이끌어 내더니 5회에는 1사 1루에서 박재상을 같은 코스의 직구로 다시 돌려세웠다. 여기에 위기관리도 뛰어났다. 3회 무사 1루, 6회 1사 1루, 8회 무사 1루에서 3번이나 병살을 유도하는데 성공했다.

▲ 3254일만의 선발승, '허용 투수' 악몽 벗었다
이정민은 '롯데 자이언츠 투수'로 보다는 2003년 이승엽에 56호 홈런을 허용한 투수로 더 잘 알려졌다. 이승엽이 홈런을 치는 모습은 몇 년동안 반복돼서 전파를 탔으며, 그때마다 이정민은 무수히 홈런을 얻어 맞았다. 당시 신인이던 이정민은 이승엽과 승부를 하라는 압박을 알게 모르게 많이 받았으며, 결국 프로야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불명예스럽게 장식했다.
사람들은 이정민이 이승엽에 홈런을 맞은 건 기억해도, 그날 경기의 승리투수인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 이날 이정민은 5이닝 5피안타(2피홈런) 3실점으로 데뷔 첫 승을 거뒀다. 그리고 3254일 뒤인 2012년 8월 29일, 이정민은 생애 두 번째 선발승을 거두게 됐다. 프로통산 11승을 거두고 있던 이정민의 승리 가운데 1승은 선발승, 10승은 구원승이었다.
또한 이정민은 2010년 4월 4일 광주 KIA전 이후 878일만에 승리투수가 되는 기쁨을 누렸다. 긴 침묵을 뚫고 나온 34살 베테랑의 승리 찬가였다.
▲ 깜짝호투 뒤에는 선배 이용훈 있었다
올해 롯데 우완 이용훈(35)은 성공스토리를 쓰고 있다. 작년까지 2군에서 주로 머물렀던 이용훈, 하지만 올해는 선발진에 합류하며 지금까지 8승을 거두고 있다. 작년 퓨처스리그 퍼펙트게임을 계기로 기회를 얻었고, 올해에도 다시 퍼펙트게임을 달성할 뻔하는 등 '제 2의 야구인생'을 활짝 열었다.
이용훈과 이정민은 오랜 시간동안 2군에서 한솥밥을 먹은 선수다. 그렇기에 이용훈은 이정민의 호투를 누구보다 바랐을 것이다. 이정민의 선발 등판이었던 18일 사직 넥센전이 끝난 뒤 이용훈은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공은 빠른데 오랜만에 선발등판을 하는데서 오는 긴장감으로 힘이 들어갔다는 게 조언의 요지였다. 또한 구위가 좋으니 높은 직구를 유인구로 쓰는 게 어떻냐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정민은 이용훈의 조언대로 이날 힘을 뺀 채 가볍게 던졌다. 그래도 최고구속은 148km까지 나왔고, 제구는 더욱 예리해졌다. 이정민의 깜짝호투 뒤에는 같은 길을 한 발 먼저 걸어간 선배 이용훈이 있었다.
이정민이 9회 마운드를 내려갈 때 3루 관중석을 가득 메운 롯데 팬들은 기립박수를 치며 최고의 예우를 보냈다. 모자를 벗은 뒤 관중들에 정중하게 고개숙여 인사를 보낸 이정민의 얼굴에는 미소만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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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백승철 기자,baik@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