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망한 국내 선발투수들을 경기를 통해 길러낼 수 있도록 하겠다. 자원은 풍부하다. 국내 선발투수들을 키우고 싶다.”
2011년 10월 10일 두산 김진욱 감독은 취임식에서 ‘토종 선발진’ 구축을 내걸며 일찍이 팀이 나아갈 방향을 정했다. 그동안 두산은 꾸준히 강팀으로 자리하면서도 2005년 11승을 거둔 박명환 이후로 단 한 명도 토종 10승 선발투수를 육성하지 못했다. 김선우가 2009시즌부터 2011시즌까지 3년 연속 두 자릿수 승을 올렸지만 30살까지 미국에서 뛴 것을 염두에 두면, 두산이 키워낸 투수라고 보기 힘들다. ‘화수분 야구’를 대표하는 팀이지만 선발투수만큼은 좀처럼 자라나지 않았다.
지난 몇 년 동안 에이스 외국인 투수와 막강 불펜진이 마운드를 지키고 공·수가 조화를 이룬 탄탄한 야수진이 그라운드를 누볐지만 단 한 가지, 선발 5인 로테이션 구축에는 늘 실패해왔다. 탁월한 재능을 지닌 투수들은 많았지만, 불펜에서 필승조 역할을 하거나 프로 적응에 실패한 채 재능을 만개하지 못했다. 결국 두산은 시즌 중반이 넘어가면 선발 로테이션 붕괴와 함께 페넌트레이스 우승에서 멀어졌고 포스트시즌에선 정상을 눈앞에 두고 쓰러졌다.

고질병에 대한 처방전은 2012시즌을 준비하는 과정부터 나타났다. 김진욱 감독은 취임사를 실천하기 앞서 정명원 코치를 1군 투수코치 자리에 앉히고 토종 선발진 구축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동안 외국인 선발투수 2명을 영입했던 것과는 달리, 에이스 선발투수와 마무리투수의 조합으로 외국인 선수를 구성했고 선발진 네 자리를 토종 투수들로 채워나갔다. 김선우를 제외하면 물음표가 가득했던 선발진, 하지만 김진욱 감독의 각오는 부임 첫 해부터 결실을 맺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풀타임 선발투수 두 번째 해를 맞이하는 이용찬이 11일 사직 롯데전에서 개인 통산 첫 완봉승과 함께 10승에 성공, 2005년 박명환 이후 7년 만에 두산이 길러낸 실질적인 토종 10승 투수가 됐다. 2009시즌부터 팀의 마무리투수를 맡아온 이용찬은 김진욱 감독의 설득으로 선발투수로 전향했고, 정명원 코치의 지도 아래 2년 만에 리그 정상급 선발투수로 도약했다.
김 감독은 “이용찬은 그야말로 타고난 투수다. 하드웨어, 투구폼, 구위 등 그야말로 엄청난 재능을 지녔다. 용찬이 개인적으로 마무리투수에 대한 애착이 강했지만 용찬이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일단은 선발투수로 뛰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며 “아무래도 5일에 한 번 등판하는 선발투수가 불펜투수보다 선수생명이 길 수 밖에 없다. 용찬이에게 마무리투수는 나중에 나이가 들어도 가능한 만큼 일단 선발투수로 뛰고 난 다음에 생각하자고 설득했다”고 밝힌 바 있다.

꽃피우지 못한 유망주로 남을 것 같았던 10년차 투수 노경은은 지난해 김진욱 감독의 지도하에 불펜에서 자리 잡기 시작하더니 올 시즌에는 선발투수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6월 6일 잠실 SK전에 선발진 공백을 메우기 위해 선발 등판, 6⅔이닝 10탈삼진 1실점으로 깜짝 호투를 펼쳤고 이후 로테이션에 합류해 14경기·90⅓이닝을 소화하며 6승 4패 평균자책점 2.89를 기록 중이다. 선발 자리에서 오히려 불펜 필승조 때보다 구위나 안정감이 향상됐고 위기마다 상대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정상급 파워피처로의 발전 가능성까지 선보이고 있다. 노경은 역시 지난 6일 잠실 넥센전에서 생애 첫 완봉승에 감격을 누렸다.
현재 두산은 팀 퀄리티스타트 68회로 8개 구단 1위를 달리고 있다. 5선발 김승회가 퀄리티스타트 9번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대로의 추세라면 선발진 5명이 모두 두 자릿수 퀄리티스타트를 달성, 베어스 역사에서 이례적인 막강 선발진을 구축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서막에 불과할지 모른다.
김진욱 감독은 그동안 두산에 입단한 파워피처 유망주들이 정작 입단 후에는 부상과 수술이 반복되며 재활군만 전전하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 올해 스프링캠프부터 변화를 꾀했다. 중도 탈락자 제도를 없애 신예 선수들이 부담 속에서 스스로 무너지는 것을 예방하려한 것이다. 이용찬의 경우 입단 첫 해 스프링캠프부터 투수진 경쟁 속에 팔꿈치에 이상을 느껴 수술대의 올라 1군 데뷔가 1년 늦었다.
김 감독은 “1군에서 뛰고 싶은 건 모든 선수들이 마찬가지다. 많은 기대를 받고 입단한 유망주들은 더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1군 자리는 한정되어 있다. 마무리캠프부터 스프링캠프까지 1군 진입을 위해 무리하게 경쟁하다가 부상을 당하곤 한다”며 “그래서 지난 스프링캠프에선 애초에 중도탈락자는 없다고 공지했다. 선수들이 무리하게 경쟁하다가 부상당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취지였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만큼 두산에는 빼어난 재능을 지닌 신예 파워피처들이 많다. 올 시즌 불펜에서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는 홍상삼과 최근 1군 콜업과 함께 불펜 필승조로 올라선 김강률 외에도 서동환, 김명성, 이원재, 진야곱이 2군 혹은 재활군에 있다. 군복무 중인 성영훈, 최현진, 장민익도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결국 김진욱 감독의 투수육성 시스템 아래 이들 중 누구라도 이용찬· 노경은처럼 될 수 있는 것이다.
처음 김진욱 감독의 취임사는 이상론에 불과해 보였다. 정작 시즌이 시작되면 어느 감독도 성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1승의 쾌감보다는 1패의 부담이 훨씬 크게 다가온다. 마냥 육성에만 전념하다가는 참담한 성적표가 눈앞에 놓인다. 그러나 이는 그야말로 기우였다. 첫 해부터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잡은 리그 최고의 선발진을 구축, 뚜렷한 성과를 냈다.
“젊은 선발진으로 앞으로 10년 동안 흔들리지 않는 팀을 만들겠다”던 김진욱호의 항해는 이제 겨우 시작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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