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들이 나를 많이 미워하셨을거야".
역시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전혀 예상 못한 그림이 현실이 됐다. 독수리 군단을 숱하게 울린 호랑이 군단의 수장이 이제는 대전에 새둥지를 튼다. 지난 8일 한화와 계약기간 2년에 계약금·연봉 3억원씩 총액 9억원에 계약한 김응룡(71) 감독은 10일 한화의 본거지인 대전을 방문, 구단이 마련해줄 거처를 찾아보는 등 한화 감독으로서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한다.
김응룡 감독이 한화 감독으로 대전에 둥지를 틀게 된 것은 마치 12년 전 광주에서 대구로 옮기던 때를 연상시킨다. 1983~2000년 무려 18년을 해태에서 몸 담은 김응룡 감독은 삼성의 간곡한 요청으로 2000년말 대구의 삼성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호화멤버를 자랑한 삼성은 그러나 창단 20년간 한국시리즈 우승이 없었다. 특히 김응룡 감독의 해태에만 1986·1987·1993년 3차례나 한국시리즈에서 졌다.

우승에 목마른 삼성은 결국 라이벌팀의 수장을 데려오는 것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김응룡 감독은 부임 2년째였던 2002년 창단 21년 만에 팀에 첫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안기며 팀의 오랜 숙원을 풀어줬다. 우승 청부사의 면모를 과시한 것이다. 김 감독 체제에서 체질개선을 이뤄내며 2000년대 중반부터 진정한 명문 구단의 반열에 올라섰다.
프로 세계는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라는 오래된 속설이 딱 들어맞는다. 김응룡 감독은 "삼성에 가서도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다. 대구팬들이 나를 많이 미워하셨다"며 "대전팬들도 미워하셨을 것이다. 나도 이렇게 한화와 인연이 될 줄은 몰랐다"고 웃어보였다. 김 감독을 미워했던 삼성팬들은 이제 첫 우승을 선사한 김 감독에게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안고 있다. 프로 세계에서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다.
때문에 한화에서는 또 어떤 역사를 쓸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한화 전신 빙그레도 김 감독 앞에서 수차례 무릎을 꿇은 아픈 기억이 있다. 1988·1989·1991년 3차례나 한국시리즈에서 해태를 만났으나 모두 패퇴했다. 1988년 2승4패, 1989년 1승4패, 1991년 4전 전패.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김 감독과 해태의 벽은 높았다. 당시 빙그레를 이끈 김영덕 전 감독은 "한국시리즈에서 계속 깨졌다. 대전팬분들께는 지금도 죄송한 마음"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어제의 적장이 오늘의 수장으로 돌아왔으니 세상만사 정말 모를 일이다. 김응룡 감독은 "(계약기간) 2년 동안 한화를 우승할 수 있는 전력을 만들어놓는 것이 내 임무 아니겠나"고 말했다. 과연 김 감독이 아픔을 지우고 기쁨의 눈물을 선사한 삼성 시절처럼 패배에 지친 대전의 한화팬들에게도 승리의 눈물을 터뜨릴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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