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나 SK의 승리를 지켜줄 것 같았던 ‘여왕벌’의 독침이 이제는 SK를 정조준하고 있다. SK로서는 지난 기억이 스쳐 지나갈 법하지만 감상에 젖어있을 시간이 없다는 게 문제다. 정대현(34·롯데)을 바라보는 SK의 시선도 꽤 복잡하다.
군산상고-경희대를 졸업한 뒤 2001년 SK 유니폼을 입은 정대현은 줄곧 팀의 수호신으로 이름을 날렸다. 2001년부터 지난해까지 11시즌을 SK와 함께했다. 성적은 더할 나위 없이 빼어났다. SK 유니폼을 입고 총 477경기에 나서 32승22패99홀드76세이브 평균자책점 1.93을 기록했다. SK 특유의 ‘벌떼야구’의 여왕벌이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은 활약이었다. SK가 정상에서 환호할 때 항상 그 중심에는 정대현이 있었다.
그러나 올 시즌을 앞두고 SK와 정대현의 길은 갈라졌다.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어 미국 메이저리그(MLB) 진출을 타진하던 정대현은 갑자기 행선지를 틀어 롯데에 입단했다. 4년간 총액 36억 원의 계약이었다. 핵심 선수를 잃은 SK의 충격은 컸다. 한 구단 관계자는 SK를 상대하는 정대현을 모습을 보며 “기분이 묘하다”라고 했을 정도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플레이오프라는 중요한 무대에서 적으로 마주치게 됐다.

준플레이오프에서 정대현이 보여준 활약은 명불허전이었다. SK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한 무력시위였다. 1·2차전에서 연거푸 세이브를 따낸 정대현은 4차전 승리투수가 되며 준플레이오프 MVP에 올랐다. 3경기 4이닝 동안 피안타는 단 하나에 불과한 반면 삼진은 4개나 잡아내는 완벽투였다. 무릎 부상으로 올 시즌 전반기를 통째로 날린 것을 속죄라도 하듯 이를 악물고 던졌다. 롯데의 베팅이 옳았음은 완벽하게 증명됐다.
이제 정대현의 다음 상대는 SK다. 정대현은 준플레이오프가 끝난 뒤 “후반기에 복귀해서 그런지 몸에 힘이 많이 남아 있다”라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다만 친정팀을 상대하는 속내는 다소 복잡해 보였다. 정대현은 “편한 마음으로 SK 타자들을 상대하려고 한다”면서도 “SK는 완성된 팀이고 경험도 많다. 항상 이겼던 팀이고 스스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며 옛 동료들을 높게 평가했다.
이를 바라보는 SK의 분위기도 정대현의 마음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구위에 대해서는 누구나 극찬했다. 13일 경찰청과의 연습경기를 앞두고 SK 야수들은 “살벌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난해까지 불펜에서 같이 울고 웃었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마무리 정우람과 조웅천 투수코치는 정대현 투구에 대한 감상에 대해 묻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역시 정대현이다”라고 엄지손가락을 내보였다.
정대현의 존재감이 롯데 불펜의 안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도 전반적인 공감대가 있었다. 정우람은 “롯데 불펜이 원래 좋았는데 후반기 (정)대현이형이 들어가면서 완성된 기분”이라고 했다. 조웅천 코치도 “포스트시즌과 같은 단기전에서는 경험이 중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정대현이라는 선수가 있었던 롯데가 두산보다는 불펜 싸움에서 유리한 상황이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옛 동료에 대한 우정과 존중도 이제는 사치다. 정대현도, SK도 16일부터는 당장 서로를 적으로 맞닥뜨려야 한다. 팽팽한 승부를 예상했을 때 정대현을 공략하지 못하면 SK는 답이 없다. 반대로 정대현이 무너지면 롯데는 불펜의 연쇄 도산 가능성이 있다.
일단 SK는 정대현을 잘 알고 있다는 점에 기대를 걸고 있다. 이만수 SK 감독 역시 정대현의 구위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도 “선수들이 다 보지 않았는가. 경험도 있고 알아서 잘 해줄 것”이라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실제 SK는 올 시즌 정대현 공략을 가장 잘한 팀이었다. 정대현에게 유일한 자책점을 안겨다준 팀도 SK였다. 정대현은 올 시즌 SK를 상대로 5경기에 나서 평균자책점 4.15로 재미를 못 봤다. 피안타율도 3할1푼3리나 됐다.
이를 감안한 듯 정대현은 “시즌에는 지나치게 SK를 의식했다”라고 털어놨다. 편안하게 던지겠다는 것도 이 연장선상이다. 이에 맞서는 SK도 정대현 공략에 사활을 걸겠다는 각오다. 결과야 어찌됐든 얄궂은 운명으로 재회한 양자는 이번 플레이오프 내내 화제의 중심으로 자리할 것이 틀림없다. 확실한 것은, 둘 중 하나만 웃는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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