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시즌은 제 아무리 강심장이라 하더라도 긴장되는 무대다. 그 긴장감을 어떻게 제어하느냐에 따라 ‘영웅’이 될 수도, ‘역적’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SK는 비장의 무기가 하나 남아 있다. 채병룡(31)이 그 주인공이다.
채병룡은 SK 마운드에서 가을잔치 경험이 가장 풍부한 선수다. 2003년부터 포스트시즌 무대에서만 15경기 등판했다. SK 투수 중 가장 많다. 성적도 좋았다. 4승3패3세이브 평균자책점 2.78을 기록했다. 활용폭 역시 채병룡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장점이다. 때로는 선발로, 때로는 불펜에서 보직을 가리지 않고 SK의 가을잔치를 지켰다.
그 과정에서 단맛도, 쓴맛도 다 봤다. 2008년 김현수(두산)를 투수-포수-1루수로 이어지는 병살타로 처리하고 우승을 결정지은 투수가 바로 채병룡이었다. 반면 2009년 나지완(KIA)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고 고개를 숙였던 투수도 채병룡이었다. 그 과정에서 채병룡은 더 성숙해졌다.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풍부한 경험은 긴장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채병룡은 이번 플레이오프에 대해서도 “큰 느낌이 없다. 정규시즌 때와 특별히 다른 점을 느끼지 못한다. 원래 긴장하지 않는 스타일이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2007년 처음 우승했을 때는 긴장을 했었다. 경기 전이 아닌 우승이 확정된 직후 긴장되더라”라며 이색적인 경험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강심장과 여유가 물씬 느껴지는 대답이다.
군 문제를 해결하고 올 시즌 SK 유니폼을 다시 입은 채병룡은 14경기에서 3승3패 평균자책점 3.16을 기록했다. 시즌 중반에 합류했음을 감안하면 연착륙이다. 특유의 묵직한 직구에 안정적인 제구력은 여전했다. 이번 플레이오프에서는 일단 불펜 대기를 지시받아 아직은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팀이 위기에 몰렸을 때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는 카드로 비중이 가볍지 않다.
게다가 팀 상황도 채병룡 카드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SK는 선발투수 중 가장 컨디션이 좋다고 판단한 김광현 윤희상을 1·2차전 선발투수로 썼다. 여기서 1승1패로 썩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얻었다. 3·4차전 선발투수로 송은범 마리오를 내정했지만 부상으로 시즌 전체를 소화하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는 선수들이다. 변수가 있다는 뜻이고 그만큼 채병룡의 조기 투입 가능성도 높아진다.
어찌 보면 얄궂은 상황이다. 채병룡이 조기에 투입된다는 것은 선발투수들이 썩 좋은 피칭을 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팀으로서는 유쾌한 상황이 아니다. 채병룡도 “난 필승조가 아니다. 1~2점 뒤진 상황에서 등판하는 투수”라고 했다. 그러나 채병룡은 “던지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면서 “편안하게 던지겠다”고 가을 베테랑다운 자신감을 드러냈다. 어조에는 당당함이 묻어난다. SK 최후의 보루가 출격 준비를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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