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듀! 코리안특급] 박찬호와 함께 울고 웃었던 19년
OSEN 윤세호 기자
발행 2012.11.29 17: 10

‘코리안특급’ 박찬호(39)가 전격 은퇴를 선언했다.
한화 구단은 '29일 오후 박찬호가 본인의 은퇴 의사를 구단에 최종 전달했고, 구단은 박찬호의 은퇴 결정을 존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박찬호는 1994년 LA 다저스와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그 계약을 맺은 이후 19년 동안 일본-한국 무대로 이어졌던 긴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지난 19년 동안 박찬호의 투구는 박찬호 혼자만 의 것이 아닌 모든 야구팬의 관심거리이자 삶 그 자체였다.   
박찬호가 다저스에서 에이스로 활약했던 시절, 야구팬들은 박찬호의 공 하나에 집중했고 꿈을 키웠다. 1994년 다저스와 계약을 체결함과 동시에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밟은 박찬호는  1996시즌부터 본격적인 빅리거가 됐고 이듬해 다저스의 에이스 선발투수로 마운드를 호령했다.
박찬호는 풀타임 선발 첫 해 14승 8패 평균자책점 3.38로 다저스의 에이스로 우뚝 올라섰다. 당시 야구팬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한국 선수의 세계최고무대 활약에 자부심을 느꼈고 IMF 금융위기 때에는 박찬호의 투구에 희망을 실었다.
박찬호가 2001시즌까지 5년 연속 두 자릿수 선발승을 거두며 다저스의 에이스로 활약하는 동안, 야구팬들은 박찬호 경기에 생활 리듬을 맞출 정도였다. 현지 낮 경기를 보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 경우도 많았는데  모든 스포츠 팬들의 시선은 박찬호 등판 결과에 집중됐다. 그야말로 박찬호로 인해 웃었고 박찬호로 인해 용기를 얻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하지만 2001년 겨울 FA 자격을 얻고 텍사스와 5년 6500만 달러의 거액 계약을 체결한 뒤로는 급격한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고질적인 허리부상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투구내용을 보였고 박찬호의 활약에 환호했던 팬들은 아쉬움 가득한 한 숨을 내쉬었다.
좀처럼 끝나지 않는 것 같았던 박찬호가 마주한 터널은 박찬호의 불굴의 의지와 함께 막을 내렸다. 박찬호는 2008시즌 불펜투수로 변신해 부활을 시작했다. 이미 30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박찬호는 다저스로 돌아와 상위팀의 불펜 필승조로 팀 승리를 지켰고 2009시즌 디펜딩 챔피언 필라델피아서도 활약을 이어갔다.
당시 박찬호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마이너리그 계약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박찬호의 도전정신은 야구 팬들에게 또 다른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메이저리그 활약 외에도 박찬호는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부터 2006 WBC까지 국제무대서 한국야구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도 직접 이바지했다. 1998년 박찬호의 대표탐 합류로 한국 야구 첫 드림팀이 구성됐고 이는 한국의 국제무대 호성적의 시발점이 됐다.
박찬호는 2011년 선발투수 복귀에 대한 간절함으로 아시아 투수 최다승124승과 함께 메이저리그 유니폼을 내려놓았다. 선발 등판을 위해 일본 오릭스와 1년 계약을 체결했고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일본에서 실패를 맛본 박찬호는 야구팬의 아쉬움을 들은 듯 현역 은퇴의 갈림길에서 국내 복귀를 선택, 연봉 전액 기부와 함께 한화 유니폼을 입고 뜻깊은 마지막 해를 장식했다.
비록 세월의 흐름을 이겨내지 못했고 박찬호가 남긴 마지막 기록도 대단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우리나이 마흔 살의 투수가 전반기 선발진 중 가장 꾸준한 활약을 펼쳤으며 박찬호로 인해 한화 구단은 최하위에도 역대 최다 관중 동원 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결국 박찬호는 2012년 11월 29일 자신의 61번 등번호를 내려놓았다. 이와 함께 박찬호를 통해 하나되어 울고 웃었던 야구팬들의 지난 19년도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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