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 선배님의 모습을 보고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게 됐습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아마추어 유망주들은 메이저리그에 도전장을 던진 이유를 이처럼 전하곤 했다. ‘코리안특급’ 박찬호(39)의 활약을 지켜보며 꿈꾸던 이들은 어느덧 한 팀의 중심이 됐고 현재 한국야구의 기둥으로 자리 중이다.
박찬호가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박찬호는 29일 2012시즌 소속팀 한화 구단에 은퇴의사를 전달하며 19년 현역 야구선수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1973년 충남 공주 태생으로 중동초-공주중-공주고를 거친 박찬호는 한양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94년 1월 LA 다저스와 계약하며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메이저리그 17년 통산 476경기 1993이닝 124승98패 평균자책점 4.36을 기록했다. 특히 124승은 아시아 투수 최다승으로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대기록이다.
기록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박찬호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1990년대말과 2000년대 초반 박찬호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야구팬들의 절대적인 영웅으로 자리 잡은 것은 물론, 박찬호를 보고 자란 아마추어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진출도 꾸준했다. 박찬호로 인해 서재응, 김선우, 김병현, 봉중근, 송승준 등이 미국 땅을 밟았고 이들의 성공과 실패 속에서 한국야구도 성장할 수 있었다.
인하대학교 재학 시절 박찬호와 함께 방콕아시안게임 대표로 선정된 서재응은 아시안게임 우승 후 1999년 뉴욕 메츠와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 입단 당시 박찬호의 뒤를 이를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혔고 2003년 메츠의 풀타임 선발투수로 신인왕 후보에도 올랐다. 2006 WBC서 대표팀 에이스로 활약한 서재응은 2008년 KIA 유니폼을 입고 국내에 복귀, 현재 KIA 투수진의 핵심전력이자 든든한 리더로 자리 중이다.
김선우는 서재응보다 빠른 1997년 11월에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했다. 팀 내 특급 유망주로 꼽혔고 마이너리그를 거쳐 메이저리그까지 순조롭게 올라갔지만 메이저리그서 활약은 꾸준치 못했다. 2005시즌 콜로라도 소속으로 완봉승을 올리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으나 제구력에서 기복을 보이며 붙박이 선발투수가 되는데 실패했다. 2008년 두산 유니폼을 입고 국내무대에 복귀한 후 탁월한 리더십과 함께 두산 에이스 투수이자 투수조의 든든한 맏형 역할을 하고 있다.
김병현도 서재응처럼 방콕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후 이듬해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계약했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한국 투수 중 박찬호 다음으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만 21살에 불과했던 2001시즌 팀의 마무리투수로 도약해 수많은 삼진을 기록했고 한국인 최초 월드시리즈 참가와 우승까지 차지했다. 2006 WBC에선 박찬호와 함께 꿈의 불펜 필승조를 형성하기도 했다. 김병현은 지난해 일본야구를 거쳐 올해 넥센 히어로즈로 복귀, 두 번째 야구인생을 시작했다.
봉중근은 1997년 신일고 2학년 중퇴와 동시에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와 전격 계약을 체결, 역대 한국 선수 중 가장 어린 나이에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2002시즌에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밟았고 2004시즌까지 선발과 불펜을 오갔다. 이후 2006 WBC 대표팀에 뽑혔고 2007년 LG 소속으로 국내무대에 복귀했다. 2008시즌부터 2010시즌까지 LG 부동의 에이스가 됐고 2008 베이징 올림픽, 2009 WBC에선 대표팀의 에이스로 호투했다. 소속팀과 대표팀에서 투수조 리더를 맡았고 올 시즌부터는 마무리투수로 팀의 승리를 지키기고 있다.
송승준은 1999년 김선우의 뒤를 이어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했다. 마이너리그시절 리그 전체적으로 주목받는 유망주였고 순조롭게 메이저리그 문 앞까지 왔지만 부상과 불운으로 끝내 빅리그 마운드에는 서지 못했다. 하지만 2007년 롯데 소속으로 국내로 유턴한 후 2008시즌부터 지금까지 롯데 선발진의 중심을 잡고 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서 미국·쿠바를 상대로 호투해 금메달의 주역이 됐으며 롯데에선 지난 시즌까지 4년 연속 두 자릿수 승을 올리며 롯데 부흥기를 이끄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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