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시대 수많은 순례자들이 로마로 향했다. 그러나 목적지만 같았을 뿐 그 길은 서로 달랐다. 그리고 그 ‘다른 길’ 속에서 다른 깨달음을 얻곤 했다. 류현진(25, LA 다저스)의 메이저리그(MLB)행은 그 ‘다른 길’을 개척했다는 점, 그리고 또 다른 깨달음을 남겼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류현진은 10일(한국시간) LA 다저스와의 최종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한국프로야구 역사를 다시 쓰는 쾌거다. 그동안 박찬호 김선우 서재응 김병현 등 대학 때 미국으로 건너가 꿈을 이룬 경우는 있었다. 그러나 류현진처럼 한국프로야구에서 MLB로 직행한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몇몇 선배들이 애타게 MLB의 문을 노크했지만 돌아온 것은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한국프로야구의 수준을 인정하지 않는 풍토 속에 일본을 경유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류현진은 이런 흐름을 일거에 뒤집는 대형 홈런을 쳤다. 헐값도 아니다. 포스팅 금액까지 합치면 보장 금액만 6년 총액 6170만 달러(665억 원)이다. 연평균으로 따지면 1000만 달러가 넘는 초특급 대우다. 한국프로야구에 적을 두면서도 좋은 활약만 선보인다면 언제든지 MLB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이처럼 류현진의 MLB행은 선수 스스로의 꿈을 이뤘다는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앞으로 자라날 유망주들의 비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 지금껏 많은 유망주들이 MLB 진출이라는 꿈에 사로 잡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미국 무대를 밟았다. 이런 추세는 류현진이 프로에 데뷔한 2006년 이후 다시 시작됐고 전면드래프트 도입 이후 절정에 이르렀다. 프로야구의 인재풀이 점점 좁아져만 가는 하나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2006년 이후 청운의 꿈을 품고 미국행 비행기를 탄 그 많은 유망주 중 아직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은 선수는 단 하나도 없다. 이학주(22, 템파베이) 정도가 잠재력을 인정받고 있는 정도다. 나머지 선수들은 여전히 마이너리그에서 눈물 젖은 빵을 씹고 있거나 심지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간다는 것은 잠재력을 극대화시키는 하나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돌려 말하면 그만큼 위험부담도 크다. 언어, 문화, 심지어 야구 스타일까지 모두 다른 미국에서 적응하기란 30대 베테랑들도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 지도 스타일도 차이가 난다. 코치들이 달라붙어 성심껏 가르치는 한국과는 달리 수많은 유망주들이 모여드는 미국은 그 시도가 애당초 힘들다. 특별한 계기가 없는 이상 기량은 정체되기 일쑤였다.
반면 2006년 프로야구에 데뷔한 류현진은 국내에서 최고 기량을 인정받았다. 그 결과 수많은 국제무대에 나갈 수 있었고 이는 류현진이 MLB에 직행하는 하나의 원동력이 됐다. 만약 류현진이 고교 졸업 후 미국 진출을 꿈꿨다면 연봉 600만 달러를 받는 지금의 류현진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에는 류현진에게 체인지업을 가르친 구대성도, 장난을 치며 분위기 전환을 할 수 있는 동료들도, 공 하나에 환호하는 수많은 팬들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선수마다 제각기 다른 사연은 있다. 상황이 다른 만큼 다른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환상에서 벗어날 시점도 됐다. 한 만화의 표현대로, 미국의 공기를 마신다는 자체만으로 기량이 쑥쑥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한국프로야구도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충분히 부와 명예를 모두 안은 채 해외 진출에 도전할 수 있다. 류현진의 세운 이정표에는 이런 내용이 분명하게 쓰여 있다. 꿈을 키우는 어린 선수들이라면 한 번쯤 되새겨야 할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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