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마무리의 효용성도 의심 받고 있는 시대다. 그런데 전문 외국인 중간계투 시대가 열릴지도 모른다. SK의 새로운 외국인 선수 덕 슬래튼(32)이 그 가능성을 열어젖히고 있다.
SK는 지난 14일 슬래튼 영입을 공식 발표했다. 올해 피츠버그 소속으로 메이저리그(MLB)에서도 10경기에 나선 슬래튼은 MLB 통산 216경기에 나가 7승8패 평균자책점 3.52를 기록한 왼손 투수다. 애리조나 소속이었던 2007년에는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 출전한 기억도 있다. 경력에서 드러나듯 큰 무대 경험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SK의 한 관계자는 “이미 올해 중반부터 우리의 영입 리스트에 있었던 선수”라고 설명했다.
슬래튼은 기교파 투수로 분류할 수 있다. 직구 구속은 88마일(141㎞) 정도로 빠르지 않다. 그 외에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을 구사한다. 우타자를 상대로는 투심 패스트볼을 즐겨 사용하기도 한다. 196㎝의 장신에서 나오는 각이 제법 예리하다. 민경삼 SK 단장은 “구속보다는 볼의 움직임이나 제구력, 변화구 구사능력을 우선시했다”라고 말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구속보다는 다른 쪽에서 장점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최근 한국프로야구의 외국인 선수 선발은 투수가 대세다. 그 중에서도 선발 요원에 집중되어 있다. 가장 효율성이 높다는 것이 검증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슬래튼은 그 흐름에서 벗어나는 선수다. 메이저리그에서 216경기를 뛰는 동안 선발 등판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이너리그 352경기에서 62경기에 선발로 나섰지만 대부분이 경력 초기에 몰려있다. 2011년에는 4경기, 올해에는 단 한 경기도 선발 등판이 없었다.
SK는 “선발·중간·마무리에서 모두 뛸 수 있는 활용도를 높게 평가했다”라고 말했지만 정작 선발로의 출격 가능성은 떨어지고 있다. 최근 선발로 나서지 않은 선수를 무리하게 개조시켰을 때의 위험부담을 생각해야 한다. 때문에 슬래튼은 불펜에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민 단장도 올해 단 한 번도 선발 등판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느냐”라고 가능성을 열어뒀다.
외국인 선수가 한국 무대에 적응하지 못해 선발이나 마무리에서 중간으로 좌천되는 경우는 더러 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중간에서 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영입한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렇다면 SK는 왜 슬래튼을 선택했을까. 팀 마운드 구조를 보면 답을 찾을 수 있다. 아직 보직이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위치에서 뛸 수 있는 선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팀 마운드 운영의 효율성 차원에서도 접근할 수 있다. SK의 선발진은 김광현 윤희상 송은범 채병룡에 또 하나의 외국인 선수 크리스 세든이 버티고 있다. 김광현의 재활 경과가 문제이긴 하지만 자원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반면 불펜은 아직 유동적이다. 정우람의 입대로 마무리 자리가 비었다. FA를 앞둔 송은범보다는 박희수의 전환이 유력하다고 가정할 때, 박희수의 몫을 대신할 새로운 왼손 계투 자원이 필요하다.
SK는 슬래튼에게 이런 몫을 기대하는 눈치다. 슬래튼이 중간에서 제 몫을 한다면 불펜 운영에도 숨통이 트인다. “무조건 선발투수”, “중간이나 마무리에 외국인 카드를 쓰기는 아깝다”라는 기존의 인식에서 벗어난 발상의 전환이라고 할 만하다. 만약 슬래튼이 성공한다면 각 팀 사정에 맞는 맞춤형 외국인 선발의 물꼬를 틀수도 있다. 슬래튼의 다음 시즌에 관심이 몰리는 또 하나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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