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의 테마토크] 사랑에 관한 여러 가지 격언 중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란 말이 있다. 사랑에 관한 관용어 중 가장 흔하게 쓰이는 말이지만 과연 그럴까?
MBC 월화드라마 ‘마의’와 SBS 주말드라마 ‘청담동 앨리스’를 보면 분명히 시대를 불문하고 사랑에는 국경이 있다. 그 ‘국경’은 신분의 차이다. 양반은 양반끼리, 천민은 천민끼리, 부자는 부자끼리, 빈자는 빈자끼리 어울리는 게 이치에 맞고 당연하다.

‘마의’는 조선시대 중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양반과 천민의 사랑은 불가능하다. 범죄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가의 규수 강지녕(이요원)과 천민 출신의 의생 백광현(조승우)은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폭풍같은 사랑에 휩싸여있다. 심지어 임금 현종의 여동생 숙휘공주(김소은)는 하늘과 땅같은 신분차이에도 불구하고 광현을 향한 짝사랑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고 결혼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과연 실현가능한 것일까? 당연히 불가능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얄팍한 지식만으로도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양반이 바라볼 때 천민의 양반을 향한 사랑은 중죄였다. 여자 천민과 남자 양반의 사랑은 부분적인 결합이 가능했을지 몰라도 남자 천민의 여자 양반을 향한 사랑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삼국사기’의 ‘온달전’은 고구려의 공주 평강이 천민인 바보 온달과 결혼한 얘기를 적고 있다. 하지만 이는 설화적 성격이 강할 뿐 실제와는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학계는 보고한다. 즉 온달은 천민이 아닌, 하급 양반이었던 것이고 내용도 평강의 사랑과 온달의 성공스토리를 드라마틱하게 꾸미기 위해 적잖게 각색한 것. 즉 공주와 천민의 결합은 옛시대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녕과 광현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이명환(손창민) 제조 영감이 지녕과 혼인시키려 하는 그의 아들 성하(이상우)는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아버지와는 달리 올곧은 인물이다. 그는 지녕을 사랑하면서도 지녕이 원치 않는 이 억지혼사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광현과 지녕의 사랑이 위험하다는 것만큼은 잘 안다. 그래서 광현에게 ‘네가 크게 다칠 수 있다’고 충고한다.
여기에서 사랑에는 국경이 있다는 게 확실해진다. 광현과 지녕이 서로의 마음속으로 갈무리한 채 연정을 품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그걸 밖으로 표현하는 것은 불륜이고 중죄이며 더 나아가 결혼이란 당시 사회적 관습이나 제도상으로 볼 때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이다.
‘청담동 앨리스’의 축은 장 티엘 샤(차승조, 박시후)와 한세경(문근영)의 파도치는 사랑얘기다. 승조는 유통재벌 로열그룹 회장 차일남(한진희)의 외아들이자 해외명품 브랜드 아르테미스의 한국지사 회장이고, 세경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딸로 대학에서 공부는 잘 했지만 유학을 다녀오지 못한 탓에 지앤의류에 비정규직 사원으로 간신히 입사한 처지다.

두 사람에게 있어서 사랑은 세상을 살아갈만한 가치관인 동시에 갈등의 근원이기도 하다.
세경은 첫사랑 소인찬(남궁민)과의 관계를 어떻게든 잘 이끌어 나가보려 하지만 두 사람의 어깨를 공통적으로 짓누르고 있는 가난이라는 무게에 인찬이 먼저 항복한다. 그렇게 인찬이 먼저 이별을 고하고 떠나가자 세경은 자신보다 잘 난 게 하나도 없던 여고동창 서윤주(소이현)가 지앤의류 회장의 아내가 돼 청담동에 입성한 것을 보고 자극받아 자신도 상류사회에 진입하고자 치밀하게 작전을 짠다.
‘이상한 나라(청담동)’로 입성시켜줄 그 ‘시계토끼’가 바로 장 티엘 샤, 즉 차승조다. 승조는 세경과의 첫만남 때 그녀가 된장녀인 줄 착각하고 자신의 신분을 장 티엘 샤 회장이 아닌, 회장의 비서 김승조로 속인다. 그리고 세경에게 회장의 스타일리스트 일을 제안하며 접근한다.
이미 승조는 인찬에 대해 지고지순한 세경의 마음에 감동한 상태였고 일로 그녀를 만나면서 ‘사랑은 있었다’고 믿게 되면서 그녀를 깊게 사랑하게 된다.
세경 역시도 샤 회장에게 접근해 어떻게든 일을 성사시키겠다는 의지와는 달리 어느덧 성실하게 살아가는 김 비서에게서 사랑을 느낀다.
김 비서를 사랑하지만 출세를 위해선 사랑을 버리고 비즈니스를 선택해야한다고 갈등하는 세경에게 놀랍고도 반가운 정보가 들어온다. 자신을 사랑하고, 또 자신이 사랑하는 김 비서가 장 티엘 샤 회장이었다는 것.
윤주는 세경에게 ‘사랑과 비즈니스는 공존할 수 없다’고 ‘청담동 선배’로서 충고하지만 세경은 두 가지 다 이룰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에 들뜬다.
김 비서가 회장인 줄 몰랐을 때 그녀는 원본능(Id)과 초자아(Super-Ego)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했지만 이젠 내적인 무의식의 힘이 이끄는 대로, 혹은 의식적인 출세매뉴얼대로 따르면 될 뿐이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이 신분을 초월한 아름다운 사랑이 될지는 미지수다. 세경의 의식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상류사회 진출의 신분상승 욕구지, 순수한 사랑의 결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과거 연인사이였던 차승조와 서윤주는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두 사람은 프랑스 파리 유학시절 그 어떤 연인 못지 않게 뜨거웠었고 그래서 두사람만의 결혼식까지 올린 사이다. 그런데 그 배경에는 윤주의 출세욕이 깔려있었다. 승조가 로열그룹 회장 차일남의 유일한 후계자였기에 그를 사랑했던 것.
하지만 차일남은 배경이 후진 윤주를 반대하고 승조는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권리를 포기하고 아버지에 등을 돌린다. 그러자 이번에는 윤주가 승조에게서 떠나간다. 재벌아들이란 아우라를 벗어던진 가난한 보통신분의 승조는 그녀가 원하던 시계토끼가 아니었던 것. 이래도 사랑에 신분의 차이가 국경이 아닐까?
그 후 윤주는 원하던 대로 부잣집 아내가 됐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그 이유는 자신의 출신성분이 ‘천민’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시어머니 정 여사(윤소정)의 눈치를 봐야 하고 ‘반가의 규수’인 시누이 인화(김유리)의 멸시와 견제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장 티엘 샤와 서윤주의 과거를 모르는 정 여사는 인화와 샤의 결혼을 추진한다. 이에 인화는 처음에는 ‘그래봐야 월급쟁이’라며 샤를 무시하지만 그가 로열그룹 후계자란 사실을 알고는 이내 표정이 달라지며 ‘그 혼사 진행하라’고 오히려 욕심을 낸다. 자, 이래도 사랑에 국경이 없고 신분의 차이가 아무런 문제가 안 될까? 이건 드라마지만 현실이기도 하다. 드라마는 픽션으로 이뤄지지만 그 픽션은 근거가 있는 창작이다.
[언론인, 칼럼니스트] ybacchu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