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의 테마토크] MBC는 지난 15일 정규 프로그램 ‘100분 토론’ 대신 김현희 특집대담 ‘마유미의 삶, 김현희의 고백’을 내보냈다. 하지만 안팎으로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못하다. MBC 노조와 시청자들은 입을 모아 ‘뜬금 없다’ ‘저의가 뭐냐’며 반발하고 있다.
북한 공작원 출신 김현희는 19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 858기를 폭파해 115명을 살해한 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1990년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마유미’ 김현희는 이후 다양한 화제를 낳았고 일부 언론에 의해 본질이 희석되고 ‘미녀 테러범’ 등으로 엉뚱하게 미화되기도 했다. 또한 일각에서는 조작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에 2003년 11월 MBC ‘PD수첩’은 ‘16년간의 의혹, 대한항공 폭파범 김현희의 진실’ 편을 통해 그녀가 진범이 아닐 수도 있다는 세간의 의혹과 관련해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가는 보도를 내보낸 바 있다.
김현희는 15일 방송에서 2003년의 ‘PD수첩’이 왜곡된 보도였다고 주장하며 자신을 가짜로 몰아가는데 대해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녀는 ‘가짜 김현희 논란은 국가문란 및 이적행위와 마찬가지로 북한을 도와주는 일이다. 내가 가짜면 대한민국이 KAL 858기를 폭파한 테러국이 되는 것이다’라며 ‘사건 당시 의혹 제기에 관여했던 사람들에게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자신이 테러행위의 장본인임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오히려 의혹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범죄자로 몰고 갔다.
MBC노조는 16일 성명서를 내고 ‘무고한 국민 115명을 죽인 희대의 살인자를 버젓이 방송에 출연시켜 세월이 약이다, 눈가가 촉촉해졌다며 위로하는 방송. 그 살인자가 전국에 방송되는 지상파 방송을 통해 당당히 언론에 사과하라고 하며 한풀이하게 해 주는 방송. 이것이 실로 21세기 대한민국 공영방송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PD수첩’이 의혹을 진실로 판명하지 못한 점은 애초 시도 자체가 무리수였다는 단점을 드러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언론의 사명을 충실히 하고자 노력했다는 의도 자체는 가상하게 봐줘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 사건 기념일도 아니고, 이 사건과 관련된 새로운 의혹이 제기된 것도 아니며, 세월이 한참 흘러 유족들이 조용히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김현희의 진범 주장을 강조하고 의혹을 제기한 언론과 여론을 호되게 야단치는 이유가 뭔지 도저히 시청자들을 납득시키지 못하고 있다.
우선 이런 방송은 김현희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유족들이야 아직도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상태일지 모르겠지만 다수의 국민들의 뇌리에서는 기억의 저편으로 묻혀버린 사건이다. 그동안 진보적 야권이 두 번이나 집권했다. 그 두 정권조차도 거론하지 않고 지나간 사건이다.
그렇다면 결국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을 다시금 조명하면서 김현희가 유족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남겼으며 대한민국 역사에 얼마나 큰 정치적 테러행위를 저질렀는가를 새삼 일깨움으로써 그녀의 마성만 부각시킬 뿐이다.
게다가 방송의 내용은 상당히 불편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벌써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거나 아니면 아직도 감옥에서 죗값을 치르고 있어야 할 희대의 살인범이 버젓이 지상파 방송에 멀쩡한 모습으로 등장했고 진행자는 그녀를 위무하는 모습을 보였다. 도대체 누가 위로를 받아야 하고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 하는지 본말이 전도된 모양새였다.
백번 강조하건대 반드시 김현희가 진범이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사적으로 지울 수 없는 오점이자 치유할 수 없는 정치적 아픔이다. 그렇다고 진실을 파헤치고자 언론의 본연의 사명을 다하고자 한 ‘PD수첩’이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 방송사에서 때 아니게 김현희 특집을 마련하고 지난 과오를 사과하는 듯한 모양새가 볼썽사나울 따름이다.
‘PD수첩’의 의도는 혹시라도 범죄자를 조작한 사실이 있었다면 그 진실을 밝혀 김현희의 누명을 벗겨주고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함이었지 조금이라도 그녀를 다시 한 번 아프게 하거나 그녀의 명예를 훼손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녀를 특별한 계기 없이 카메라 앞에 내세우고 새삼스럽게 과거의 아픔을 다시 들춰내며 유족들의 흉터에 또 다시 칼질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혹시라도 과거 집권자들이 정권유지상 필요에 따라 안보를 강조하던 나쁜 선례를 따르고자 했다면 그것은 정말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MBC는 이번 정권 들어 방송사상 유례없는 장기파업, 왜곡 편파 방송 논란, 뉴스의 잦은 실수, 그리고 사장 문제 등으로 이미 시청자들로부터 외면당해 신뢰도와 시청률이 바닥인 상태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언론인, 칼럼니스트] ybacchu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