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초 종영된 SBS 월화극 ‘드라마의 제왕’(극본 장항준 이지효, 연출 홍성창)에서 초짜 신인 드라마 작가 이고은은 해사한 얼굴로 드라마판의 백전노장들을 차례로 자기편으로 돌려세웠다. 산전수전을 겪으며 이윤을 추구하는데 철저한 드라마 제작자 앤서니 김의 경직된 마음을 녹이고, 한류스타 강현민을 설득하여 오롯이 제 의지가 담긴 드라마 ‘경성의 아침’을 집필했다. 그리고 결과는 시청률 고공행진과 함께 작품에 관여한 모든 사람이 한 단계 도약하는 대성공으로 귀결됐다. 선한 의지로 오로지 작품 내적인 것에만 집중했던 고은의 승리였다.
이를 연기한 정려원은 배역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그와 같은 인물을 사랑하는 천생 이고은 같은 배우였다. 그의 연기가 ‘드라마의 제왕’을 통해 호평 받았다면, 이는 캐릭터의 특징을 관통하는 가장 큰 줄기를 공감하고 같은 마음을 품은 덕택이었을 것이다.
◆ 대본수정? 한 번도 요구한 적 없다

‘드라마의 제왕’은 실감나는 드라마 제작기로 시청자의 구미를 자극했던 작품이다. 드라마 한 편이 제작되는 과정에서 톱스타를 캐스팅해야 방송사로부터 편성을 따내고, 이를 위해 회당 1억여 원의 출연료가 오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변수로 촬영이 중단되는 상황이 매회 에피소드를 촘촘하게 채웠다.
배우라면 이러한 과정을 잘 알고 있을 것 같지만 정려원은 오히려 ‘드라마의 제왕’을 통해 드라마 제작과정을 알게 된 부분이 많다고 했다.
“저 역시 궁금했던 부분이 있는데 굳이 묻거나 알아내려고 하진 않았어요. 예를 들면 ‘경성의 아침’ 연출자 구 감독(정인기)과 앤서니가 엔딩 장면 촬영을 놓고 금전적인 문제로 싸우는 씬 같은 건 전엔 잘 몰랐던 부분이에요. 그걸 작품을 하면서 비로소 알게 된 건데, 예상으로만 ‘그렇지 않을까’ 싶었던 부분들을 이참에 확인하게 됐죠.”
‘드라마의 제왕’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지만 정려원에겐 전혀 생소한 대목 역시 있었다. 바로 극중 톱스타 성민아(오지은)와 강현민이 작가를 찾아가 요구한 대본수정이다. 자기 구미에 맞도록 극이 전개돼야 한다는 오만한 생각부터, CF와 같은 금전적 문제가 걸려있어 종종 이 같은 요구가 자행되곤 했다.
“저는 대본 수정은 이제껏 한 번도 요구해 본 적이 없어요. 작가의 의도가 있고, 스토리가 이에 어긋나지 않으려면 그대로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수정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없는 거죠. 주변에서 그런 모습을 볼 때 그러려면 차라리 다른 작품을 선택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는데, 맞고 틀리고를 떠나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실제로 겪어봤던 배우들 중에는 그렇게 익스트림한 사람은 없었어요. 물론 그런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는 좀 들어봤어요.(웃음)”
극중 드라마 작가 역할을 한 만큼 배우가 아닌 작가의 입장을 이해하는 계기도 됐다. 특히 그간 드라마를 촬영하며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던 부분들에 대해선 이번 작품을 통해 그 원인과 이유를 파악하기도 했다.
“대사를 하다 보면 이야기와 전혀 상관이 없이 무언가를 선전하는 말을 해야 할 때가 있어요. 사실 그런 부분은 실제로 배우와 작가를 굉장히 힘들게 만드는 부분인데, ‘드라마의 제왕’에서 그 대목을 굉장히 시원하게 꼬집어서 얼마나 통쾌했는지 몰라요. 그리고 더 나가서 그 원인 제공자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어요. 도대체 드라마 제작 환경을 이렇게 만든 이들이 누굴까, 뭐가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걸까에 대해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죠.”
그가 이야기한대로 ‘드라마의 제왕’에서는 극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뜬금없이 등장하는 PPL 이라든가 방송사의 시청률 지상주의 등 드라마 제작 과정의 병폐로 지적돼 온 문제들이 거름망 없이 직접적인 표현과 함께 집중 포화를 맞았다. 특히 방송사가 광고 판매의 이유로 시청률이 저조한 작품을 단칼에 폐지하고 그 자리에 자극적인 설정으로 가득한 드라마를 투입하는 현실을 꼬집으며 “편성은 방송사 고유의 권한이기 이전에 시청자와의 약속”이라고 일갈하는 등 통쾌한 직격탄이 쏟아졌다.
“드라마 국장이 극중에서 ‘갑이면 갑다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이야기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저는 그 대사로 스트레스가 풀렸어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당장은 힘들 수도 있겠지만 한 가지 입맛의 작품만 만드는 게 아니라 뷔페를 마련하는 게 결국은 드라마 만드는 사람들에게 발전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드라마를 하는 것에 힘이 되고 싶고, 저 또한 이를 돕는 실질적인 무언가를 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을 하게 됐죠.”

그리고 이 같은 생각을 하기까지 ‘드라마의 제왕’과 그 속에서 끝까지 자기 신념을 지켜준 소신 작가 이고은이라는 캐릭터는 정려원에게 큰 힘이 됐다.
“고은이가 인간애를 외치다가 끝내 실패하는 게 아닌 결론이 저에게 힐링이 됐어요. 고은이 같은 신념을 가진 사람이 절대로 타협하지 않고 결국 ‘경성의 아침’이라는 작품을 통해 실력을 인정받고 보상을 받는 대목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성공사례를 보여준 거니까요.”
이와 같은 믿음을 같은 마음으로 지지해준 건 결국 ‘드라마의 제왕’을 집필한 장항준·이지효 작가였다. 정려원에게 이고은 캐릭터를 제안했을 때 소개한 캐릭터 설명을 끝까지 고수한 것을 비롯해 저조한 시청률에도 극의 기획의도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장 작가님으로부터 이고은 캐릭터를 제안 받았을 때 혹시라도 결말이 새드엔딩이면 저는 못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드렸었어요. 왜냐하면 열악한 한국 드라마 제작기를 한바탕 보인 뒤에 ‘세상이 원래 이래’하고 결론을 맺어 버리면 그 속에서는 어떤 희망도 치유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장 작가님께서 과정은 분명 험난하지만 고은이 같은 삶을 살았을 때 반드시 그 속에서 성장하고 얻어가는 게 있다고 이야기 하셨고, 그 말에 동의해 ‘드라마의 제왕’ 출연을 결정했어요. 저는 드라마 작가를 비롯해 모든 창작자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창작을 하는 의도라고 생각해요.”
이 같은 생각을 하기까지 정려원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초반 기획의도와 달리 시청자 반응에 따라 수정이 반복되고 그래서 처음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영혼 없는 캐릭터를 연기해야했던 힘들었던 경험이 있다.
“바나나케이크인 줄 알고 출연했는데 시간적 경제적 여건을 따지면서 결국 당근케이크를 만드는 작품에 출연했던 적이 있죠. 그때 손님에게 가장 맛있는 바나나케이크인 것처럼 이야기 하는 저를 보며 회의감을 느꼈었어요. 당시 ‘나는 배우가 아니라 거짓말쟁이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죠.”
창작자에게만 엄격한 요구를 하는 건 아니다. 정려원은 이번 ‘드라마의 제왕’이라는 작품을 통해 이전까지 생각해왔던 꿈을 좀 더 선명히 하는 계기를 맞았다.
“지금 시대는 과거처럼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미래세대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때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자리를 꿰찬 것이 바로 미디어죠. 그런데 그걸 만드는 사람이 부패해 있다면 그것이 토해내는 결과는 뻔해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미디어가 건강했으면 좋겠고 이를 만드는 환경도 개선됐으면 좋겠어요. 그 부분이 제가 연기를 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됐어요.”

◆ 김명민과 최시원
함께 호흡을 맞춘 배우 김명민과 최시원은 정려원이 ‘드라마의 제왕’을 촬영하며 마지막까지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도록 의지를 북돋아준 소중한 동료들이다. 그는 “두 사람은 극명하게 다르지만 보는 것만으로 배움을 줬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김명민 선배를 통해 작품을 대하는 예의가 뭔지를 배웠어요. 선배는 현장에서 공부벌레처럼 매번 대본을 겨드랑이에 끼고 계셨어요. 그 모습에 ‘안 그래도 잘하는 데 저렇게까지 노력하다니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하라고’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워낙 철저하게 준비하시기 때문에 NG내는 사람이 부끄러워지고 그러다 보니 다들 더 노력하게 되더라고요. 좋은 건 이런 노력들로 인해 촬영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그런 자투리 시간을 모으다 보니 일주일에 한 번씩은 쉴 여유가 생겼다는 거예요. 선배는 단 한 번도 ‘좋은 사람이 돼야해’라는 언급 없이 삶 자체로 동기를 부여해주신 분이세요. 왜 수많은 배우들이 선배를 롤모델로 꼽는지 제대로 알았죠.”
“시원이는 예전에 성경공부를 하면서 친해진 동생인데 그 친구가 오면 분위기가 확 밝아져요. 에너지가 방전될 것 같은 순간에도 시원이의 등장에 다 같이 기분이 업이 됐죠. 시원이의 극중 역할이 등장 때마다 빵빵 터뜨려야 하는 데 사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에요. 가만히 있다가 저격수처럼 완벽히 명중시켜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상당한 에너지가 들어가거든요. 슈퍼주니어의 홍수 같은 스케줄 속에 그걸 묵묵히 해내는 걸 보고 대단하다고 느꼈어요.”
◆ 패셔니스타의 비결
정려원은 연예계에서 옷 잘 입는 스타로도 유명하다. 시상식을 비롯해 각종 행사마다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빛내는 이른바 ‘옷발’로 패션블로거를 비롯한 대중에게 패셔니스타라는 인식을 심었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면 잘하지 않는 게 오히려 힘들 거예요. 저는 옷을 참 좋아해요. 어릴 때부터 엄마 옷에 대한 관심이 참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 관심을 많이 갖고 연구하게 되고 그러면서 저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이 뭔지를 찾아가게 된 것 같아요. 계속 시도하다 보면 연구하게 되고,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나한테 맞지 않는 옷은 거르고 버리기도 하죠. 패셔니스타의 비결 보다는 옷을 좋아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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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준 기자 jpnews@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