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9일. 제 7대 프로야구선수협회(이하 선수협) 회장을 선출된 박재홍은 약간 당황한 기색이었다. “내가 될 줄은 몰랐다”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내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할 것”이라며 다부진 각오를 드러냈다. 박재홍은 그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그 감투는 ‘선수 박재홍’의 입지에 그다지 좋은 영향을 주지 못했다.
통산 세 차례나 30-30 고지를 정복한 호타준족의 대명사 박재홍이 정들었던 그라운드를 떠난다. 박재홍은 25일 오후 기자회견을 열고 은퇴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힐 예정이다. 박재홍이 남긴 기록은 그야말로 화려하다. 1996년 현대에서 프로에 데뷔한 박재홍은 16년 동안 통산 1797경기에서 타율 2할8푼4리, 300홈런, 1732안타, 1081타점, 267도루, 3000루타를 기록했다. 프로야구로서는 또 하나의 전설을 떠나보내게 되는 셈이다.
박재홍은 지난해 11월 소속팀 SK로부터 은퇴식 및 지도자 연수를 제의받았다. 사실상의 방출통보였다. 박재홍은 이 제안에 고개를 흔들었다. 현역을 더 연장하길 원했다.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빌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시장에는 생각보다 더 매서운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아무도 박재홍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결국 두 달여 동안의 구직난에 지친 박재홍의 선택은 깔끔한 은퇴였다.

오프시즌 동안 박재홍은 직접 새로운 팀을 찾아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현역 연장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연봉도 양보가 가능하다고 했다. 처음에는 외야 자원이 필요한 몇몇 팀이 박재홍에게 관심을 보였다. 곧 새로운 팀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됐다. 그러나 많은 나이가 발목을 잡았다. 올해로 만 40세가 되는 베테랑 외야수는 어느 팀에나 부담스러웠다. 얼마나 더 건강하게 활약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계산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나이 못지않게 박재홍의 앞길을 가로 막은 요소가 있다. 바로 선수협 회장직이었다. 2011년 11월에 취임한 박재홍의 임기는 2년이었다. 선수협 회장이라는 직함이 박재홍의 새 팀 찾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실제 구단들은 여기에서 난색을 드러냈다. 21세기에 접어들었지만 선수협 회장에 대한 구단들의 인식은 여전히 20세기에 머물러 있었다.
한 구단은 “선수협 회장에서 물러나야 영입이 가능하다”라는 조건을 내건 것으로 전해졌다. 영입에 관심이 없었던 다른 구단 관계자들도 “선수 가치가 예전만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선수협 회장을 데려갈 팀이 있겠느냐”라고 입을 모았다. 심지어 SK 관계자도 “박재홍이 새 팀을 찾지 못한다면 그와도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선수협을 보는 9개 구단의 시선은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더 아쉬움이 남는 은퇴다. 구단들의 의사결정구조에는 ‘선수’ 박재홍의 가치가 아닌 ‘회장’ 박재홍의 비중이 더 컸다. 그러나 ‘선수’ 박재홍은 여전히 1~2년 정도는 더 건강하게 뛸 수 있는 요긴한 자원이었다. 지난해 박재홍은 부상으로 46경기 출전에 그쳤다. 그러나 부상의 덫에 걸리기 전인 시즌 초반에는 활약상이 괜찮았다. 4월 3경기에서 타율 5할을 치며 SK의 라인업에 복귀한 박재홍은 5월 22경기에서 타율 2할3푼1리, 15안타, 3홈런, 11타점을 기록했다.
부상이 아니었다면 박재홍의 2012년 성적은 더 좋아질 수 있었다. 한 번 끊어진 흐름을 되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는 몸이 건강하다면 나름대로의 활약을 할 수 있다는 예상의 전제이기도 했다. 설사 주전급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오른손 대타 요원으로는 경험이 풍부한 박재홍 만한 자원도 많지 않다. 모든 구단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선수 박재홍의 가치는 ‘회장’이라는 직함 앞에 묻혔다.
구단들이 선수협 활동을 탐탁찮게 여기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선수협 총회 참석을 막았던 초창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선수협 활동이 구단에는 별다른 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선수협을 이끄는 수장인 역대 회장들은 항상 이런 편견과 싸워야 했다. 전임 회장이었던 손민한은 임기 내내 집요한 ‘하차 요구’를 받아야 했고 박재홍은 결국 그 직함이 입단 불발로 이어지는 하나의 단초가 됐다.
그러나 선수협 회장직이 경기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신빙성 있는 자료는 어디에도 없다. 선수협 회장으로서도 나름대로 굵직한 족적을 남긴 박재홍이 그 핑계를 대고 훈련을 게을리 했다는 이야기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별개의 문제였다.
박충식 선수협회 사무총장은 지난해 말 박재홍의 거취 여부를 놓고 “시대가 변했는데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구단의 잘못”이라고 일침을 놨다. 하지만 구단들의 인식은 변하지 않았음이 이번 사례를 통해 확인됐다. 선수협이 공식 출범한 지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의식은 아쉽다. 박재홍의 은퇴가 프로야구에 던져주는 씁쓸한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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