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박찬욱. 한국의 문제적 영화 감독들이 둘 다 '여자' 이야기를 들고 국내 스크린에 컴백했다. 장르와 개성이 전혀 다른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둘 다 여자가 주인공이라는 것.
보통 남자 감독들이 여자 주인공을 화자로 내세울 때 애를 먹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들은 그간 여주인공을 다루는 모습들이 범상치 않아 주목을 받아왔다. 더욱이 두 감독 모두 새로운 뮤즈의 등장이란 점에서도 주목할 만 하다.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남자들이 욕망하는 소녀 같은 아가씨(정은채)

홍상수 감독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여주인공 해원(정은채)은 남자들이 한 눈에 호감을 느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다. 감독도 이를 인지하고 있는 지 "넌 너무 예뻐", "정말 귀족적이야" 등의 대사가 줄곧 등장한다. 정은채는 그간 홍상수 감독에 등장했던 어떤 여배우들보다도 본능적인 아름다움을 뽐낸다.
극 중 해원은 영화과 학생으로 자신을 가르치는 교수 성준(이선균)과 불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어린 시절 영국에서 살다 온 해원은 영어도 잘 하고, 엄마가 미스코리아에 나가 보라고 할 정도로 외모도 뛰어나고, 학교에 부자라는 소문이 나돌고 '돈은 마음만 먹으면 벌 수 있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할 정도로 형편도 괜찮은, 어디 빠지는 구석이 없는 아가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원은 특별히 뭔가 이루려거나 갈망하는 것이 없다. 그녀를 괴롭히는 지지부진한 연애(불륜)도 엄마가 캐나다로 이민가는 슬픔보다 더해 보이지는 않고, 우연찮게 하루 만난 남자와 결혼 생각도 해 본다. 그녀가 영화 속에서 가장 열의를 보일 때는 프랑스의 배우 겸 가수 제인 버킨을 길에서 만나 "당신의 딸(샤를로뜨 갱스부르)처럼 되고 싶다"라고 말할 때다.
해원은 그녀와의 관계가 들통날까 안절부절하면서도 해원의 과거를 듣고 상욕을 하는 성준보다 관계적으로 우위에 있다. 홍상수 감독의 전작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옛 남자친구에게 끌려가 욕을 보는 성현아나 친오빠에게도 성적으로 시달리는 '오 수정'의 이은주와는 사뭇 다르다. 남자들의 욕망이 되는 해원은 자기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잠자리를 같이 해 주는 데 큰 의미를 두지도 않고, 질척거리는 성준과의 사랑이 가슴아프지만 그보다도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그 이름으로 살고 싶은 바람이 더 커 보인다. 성준이 착하다고 말하자 정색하며 "나 악마에요"라고 말하는 해원은 아직은 자기가 정확히 누군지 모르는 정체성을 찾아가는 소녀에 가깝다.
- '스토커' 욕망을 알아가는 여인같은 소녀(미아 바시코브스카)
'박찬욱의 뮤즈'는 좀 더 드라마틱하고 분명하다. 이미 '복수는 나의 것'과 '박쥐'에서 이영애와 김옥빈을 매혹적인 팜므파탈로 변신시켰던 박찬욱은 '스토커'에서 여인으로 성장하는 18세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밀도있게 그려낸다.
이 영화는 18살 생일, 아버지를 잃은 소녀 앞에 존재조차 몰랐던 삼촌이 찾아오고 소녀 주변의 사람들이 사라지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심리 스릴러이지만 한 소녀의 성적 자각(성장기) 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가 욕망하는 대상은 그녀 앞에 갑자기 등장한 눈빛이 묘하게 매력적인 삼촌이 된다.
전작 '올드보이'에서도 등장했던 근친상간적인 코드가 녹아있지만 표현은 은유적이다. 하지만 피아노 앞에서 인디아(미아 바시코브스카)가 삼촌 찰리(매튜 구드)와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며 절정을 느끼는 장면이나 사람을 해친 후 등장하는 샤워신 등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목까지 단추를 채운 단정한 블라우스에 로퍼를 신고, 남들이 자신의 몸을 닿는 것 조차 질색하던 인디아가 굽이 낮은 신발을 벗어버리고 하이힐을 신을 때, 그녀는 자기가 누군지 비로소 알아차린다. 인디아는 어리지만 자신의 원하는 것과 원치 않는 것을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자신의 성인 '스토커(stoker)'가의 피를 온몸으로 느낀다. 뱀파이어와 인디아와 삼촌의 성인 중의적 의미를 지닌 '스토커'란 제목의 뜻은 여러 의미로 파악된다.
홍상수와 박찬욱의 '그녀들'은 모두 순수와 본능 사이에서 매력을 뽐내지만, 정은채가 관객에게 '내가 누구인 것 같아요?'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안개같은 아가씨라면, 미아 바시코브스카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며 자기에 대한 확신으로 보는 이를 끌어들이는 카리스마 넘치는 소녀이다. 두 뮤즈가 각각 감독과 닮지 않았을까? 두 영화 모두 28일 개봉한다.
nyc@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