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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승 1패의 나쁘지 않은 성적을 안고도 ‘이닝 득실차’라는 대회 순위규정에 의해 3위로 밀려 2라운드 진출이 무산된 한국이지만, 결과적으로 WBC 1라운드 탈락의 결정적 빌미가 되고 말았던 대 네덜란드 전은 돌이켜보면 우리에겐 여러 가지로 운까지 따라주지 않았던 악몽의 일전이었다.

경기 시작부터 쏟아져 나온 믿었던 야수들의 잇단 실책, 잘 맞은 타구의 야수정면 아웃과 역으로 터져 나온 빗 맞은 상대 타구의 안타돌변 등 이닝이 거듭될수록 매듭이 풀리기는커녕 되려 상황은 점점 꼬여만 갔던 모양새. 이처럼 악화일로를 걷고 있던 한국에 사실상 전의를 상실하게 만든 상대의 카운터펀치가 터진 것은 0-4로 끌려가던 7회말이었다.
당일 보여준 무딘 공격력과 얼마 남지 않은 이닝을 감안하면 더 이상의 추가실점은 곧 대패로 이어질 것이 자명했던 7회말, 무사 만루의 위기에서 승리의 여신은 우리 대표팀을 완전히 외면하고 말았다. 그것도 제대로 된 한 방이 아닌 다소 애매하고 교묘한 네덜란드의 수비방해성 주루플레이를 통해.
상황을 돌이켜보자. 구원투수 정대현은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절벽 앞에서 네덜란드의 앤드류 존스를 맞아 투수 앞 땅볼을 끌어냈고, 포수에게 연결해 1-2-3으로 이어지는 병살 플레이의 완성을 통해 극적으로 위기모면을 눈 앞에 두는 듯 보였다.
이 과정에서 문제가 터진 길목은 포수 강민호가 정대현의 송구를 잡아 3루주자를 포스아웃 시킨 뒤, 타자주자를 잡기 위해 다시 1루 쪽으로 송구하려는 동작에 들어간 시점이었다. 강민호가 자세를 바꿔 1루를 겨냥해 공을 뿌리려는 순간, 슬라이딩해서 들어오는 3루주자 조나단 춥스의 발이 강민호의 다리를 건드렸고, 이 영향으로 중심이 흔들린 강민호의 송구가 속절없이 외야 쪽으로 흐르고 만 것이었다. 이 사이 2루주자가 홈으로 유유히 들어오며 스코어는 0-5.
이 상황에서 당시 대표팀은 3루주자의 수비방해성 플레이에 대해 별다른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지만, 수비방해 규정에 담겨있는 규칙제정의 기본정신을 생각하면 3루주자의 주루플레이는 수비방해를 선언했다 하더라도 큰 무리가 없었을 만큼의 상당부분 문책 가능한 지능적 플레이였다고 볼 수 있다.
태그상황이 아닌 포스상황에서 당시 3루주자가 정대현의 홈 송구로 아웃된 시점은 주자가 홈에 도착하기 훨씬 이전이었다. 송구와 비슷한 시간대에 홈에 들어온 것이 아닌 만큼, 이미 아웃 된 주자의 뒤늦은 홈에서의 슬라이딩은 시간적으로 정당한 주루플레이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주루행위였다. 다시 말해 병살을 막기 위한 수비방해 의도가 다분한 슬라이딩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심판진은 3루주자의 슬라이딩을 정상적인 주루플레이로 간주, 신체접촉이 만들어낸 포수 악송구에 의한 실점을 상대의 정당한 득점으로 인정해버렸다. 즉 주자의 다분했던 ‘고의적’인 행위부분을 따로 지목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완전 ‘고의’가 아니라 ‘미필적 고의’로 판단한 것이다.
(수비방해는 심판원의 주관적인 잣대로 판정을 내리는 부분이기에 선명한 답안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야구규칙에 명시된 여러 수비방해 규정에서 가장 엄하고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 부분을 들라면 그것은 주자의 ‘고의’에 관한 부분이다.
특히 아직 아웃되지 않은 주자의 수비방해보다 이미 아웃된 주자의 고의적인 수비방해 의도에 관해서는 아주 엄격한 페널티의 적용을 요구하고 있는데, 수비방해 관련규칙 6.05(m)과 7.09(f)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야수가 송구를 받으려고 하거나 송구하려는 것을 전위주자가 고의로 방해했다고 심판원이 인정하였을 경우에는 타자를 아웃으로 한다.”
“아웃이 선고된 직후의 타자 또는 주자가 다른 주자에 대한 야수의 플레이를 방해하였을 경우에는 그 주자는 동료선수가 상대 수비를 방해한 것에 의하여 아웃이 된다.”
물론 규칙 말미에 이미 아웃된 주자의 계속 뛰는 행동만을 가지고 야수를 방해하려 했다는 혐의를 적용하지 말도록 규칙은 요구하고 있지만, 이는 정상적인 주루행위를 전제로 한 규정이다. 홈 도착 서너 발 전에 이미 포스아웃이 인정된 주자의 때늦은 슬라이딩 시도가 과연 정상적인 주루플레이였는지는 심판원만이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문제지만, 상식적인 정황상 여전히 의문이 남는 대목이다.
한국프로야구에서 오랜 동안 한 길을 걸어온 베테랑 심판원의 눈을 통한 접근 역시 당시 상황은 충분히 수비방해 적용이 가능한 구석이 많아 보인다는 해석을 듣고 보면 더욱 아쉬워지는 대목이다.
규칙상 수비방해 행위를 저지른 주자를 아웃시키거나, 방해 주자가 이미 아웃된 주자일 경우 대신 아직 아웃되지 않은 수비대상의 주자를 아웃시키는 이유는 공격 측의 비신사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야구에서 주자와 야수가 충돌하는 경우, 두 선수 모두 정상적인 플레이를 했다손치더라도 대개는 수비수를 우선적으로 배려한다. 수비방해가 선언되지 않아 1루에 살아나간 앤드류 존스가 다음 타자의 2루 땅볼 때 2루로 달려가다 2루수 정근우와 충돌해 결국 수비방해로 아웃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 의해서다.
당일 상대의 정교한(?) 수비방해 하나로 승부의 큰 줄기 자체가 비틀린 것은 아니지만, 흐름의 경기인 야구 특성상 사소한 요소 하나로 인해 얼마든지 경기 후반 승부의 물꼬가 달라지곤 하는 모습들을 떠올려본다면 과정이 바뀐 결과는 또 알 수 없는 일이다.
국내프로야구에서도 경기 중 이미 아웃된 주자에 대한 수비방해 선언과 적용여부를 놓고 감독과 심판원 간에 설전이 오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때 수비방해를 푸는 하나의 열쇠는 주자의 고의성과 그 확실성 여부이다. 그리고 그 갈림길에는 ‘고의’와 ‘미필적 고의’가 나란히 서 있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