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타이틀이 붙은 드라마에도 혼신의 힘을 담은 배우의 열연이 있다면 쉽사리 눈을 돌리기 힘들다. 막무가내식 전개로 질타를 받고 있는 SBS 월화드라마 ‘야왕’(극본 이희명, 연출 조영광)에서 이러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배우가 있다. 주인공은 남녀 주연배우가 아닌 극중 백학그룹 장녀 백도경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는 배우 김성령이다.
‘야왕’은 현재 살인교사를 밥 먹듯이 일삼는 주다해(수애 분)의 엽기적인 행각과, 이에 대응하는 하류(권상우 분)의 어설픈 복수가 반복되며 힘 빠진 전개를 이어가고 있지만, 지난 18일 방송을 통해 실로 오랜만에 공감할 수 있는 분노 장면이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다해에 의해 아들 도훈(정윤호 분)을 잃은 도경이 참을 수 없는 분노감에 휩싸여 다해에게 위해를 가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도경은 살인을 저지르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다해를 마주하고 복부에 가위를 찌르는가 하면, 석유를 뿌리며 불태워 죽이겠다고 이를 가는 등 최고 수준의 분노감에 휩싸인 모습으로 다해의 공포감을 자아냈다.
도경의 이 같은 행동은 그간 다해가 ‘야왕’에서 주로 저지른 행각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지만, 그 정서의 깊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열여덟 살 무렵 도훈을 낳고 29년간 이 사실을 비밀에 붙이며 자식에게 한 번도 따뜻한 엄마가 되어주지 못한 도경의 한이 부른 이 같은 범죄는, 신분상승에 대한 욕망으로 똘똘 뭉친 다해의 막무가내식 악행과는 차원이 다르다. “불에 타죽는 고통이 어떤 건지 너도 느껴봐”라는 섬짓한 대사가 도경의 입에서 뱉어질 때 느껴지는 건 막장극에서나 등장할 법한 엽기적인 복수 행각이 아닌, 자식을 잃고 자기 삶까지 놓아버린 진정한 의미의 막다른 골목에 선 어미의 한과 그에 대한 납득이다.

그리고 이를 연기한 김성령은 끓어오르는 분노감을 얼굴 전체는 물론 온몸에 새긴 모습으로 시청자의 몰입도를 최고치로 끌어올린다. "잘 봐. 네가 죽인 도훈이 엄마 얼굴이야"라며 수애의 코앞까지 일그러진 얼굴을 들이미는 김성령에게서 느껴지는 건 빼어나게 아름다운 그의 이목구비가 아닌, 벼랑 끝에 선 상처 받은 어미의 황량한 내면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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