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경의 드라마에는 버려지는 캐릭터가 없다. 노 작가는 주연 아닌 조연,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이들까지도 온기 있는 손길로 보듬는 재주와 마음을 지녔다. 시청률 1위의 수목극 SBS '그 겨울, 바람이 분다' 역시 마찬가지다. 남녀주인공 조인성과 송혜교가 무서운 존재감을 형성한 가운데서도 주변의 많은 인물들 역시 저마다 브라운관을 꽉 채우는 카리스마를 내뿜는다. 박진성 역의 김범, 왕비서 역의 배종옥, 조무철 역의 김태우, 장 변호사 역의 김규철에게도 사연은 있다. 이들은 오수(조인성 분)와 오영(송혜교 분)의 이야기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건 아니다. 각자의 사랑이, 아픔이 있고 그래서 살아가고 있다.
오수의 여인, 톱 여배우 진소라 역을 연기한 서효림 역시 마찬가지다. 오수를 향한 미저리 같은 사랑 때문에 시청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했던 진소라는 지난 밤 12부에서 결국 오영에게 오수의 정체를 폭로하곤 출국했다. 그토록 가지고 싶던 남자 대신 거액이 담긴 돈 가방만을 쥔 채,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애증과 미련까지 끌고 떠났다.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그녀, 1회부터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하며 끝까지 뚜렷한 족적을 남긴 명품 '특별출연'이다. 시청자들은 그녀로 인해 곤경에 빠지는 오수를 불안하게 바라보기도 했지만, 반대로 오수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끝내 버려지는 그녀의 모습에 아파하기도 했다.
특별출연이지만 노 작가의 드라마라 믿음을 가졌고, 촬영 내내 마치 주인공이 된 듯 몰두할 수 있었다는 서효림을 마지막 촬영을 끝낸 어느 날, 만났다.

다음은 서효림과의 일문일답.
- '그들이 사는 세상'에 이어 노 작가와는 두 번째 인연이다.
회사(소속사)를 통해서 캐스팅 제의가 왔는데, 기뻤다. 사실 특별출연이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중요하고 분량도 많을 줄은 몰랐다. 큰 열쇠를 쥐고 있지 않았나. 처음엔 '너무 악한 역할은 아닐까' 걱정도 했는데 역시나 노희경 선생님이라 매력적으로 잘 풀어주셨더라. 시작 전부터 대본에 대한 믿음이 컸고 노 작가님이나 김규태 감독님과 같이 작업도 해봤던 만큼 즐겁고 행복하게 작업했다. 사실 '특별출연'이란 것이 분량이 굉장히 작은 경우가 많은데 이번 작품은 마치 16부작 미니시리즈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작업이었던 거 같다. 상당히 긴 시간동안 굉장히 여러 번 촬영했다.
- 오수를 괴롭히는 팜므파탈이었다. 악역에 가까운 캐릭터에 부담은 없었나
처음에 대본을 봤을 때는 '내가 봐도 이건 미저리다' 싶더라.(웃음) 그런데 너무 매력있고 욕심이 생기는 거다. 시청자들이 볼 때 놀랄 만큼 미저리처럼 연기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노 작가님께서 '사람들이 너를 미저리로 보더라도 너는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오수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고 생각해야지. 지나친 사랑이지만 스스로 타당성을 가지라'고 하셨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을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단지 사랑하는 방법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연기했다. 처음 해보는 캐릭터라 할수록 신도 났다.
- 그래도 정규 배역은 아닌데, 특별 출연을 선택한 계기는 뭘까
이번 작품은 인연이 많다. 노 작가님은 물론 김규태 감독님도 '그들이 사는 세상' 당시 B팀 연출이셨기 때문에 잘 알고 지냈다. 배종옥 선배님이나 송혜교 언니도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이미 함께 했던 분들이라 어색하지 않고 편안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모든 분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분들 아닌가. 작품의 성공 여부나 캐릭터, 분량을 떠나서 '이런 분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가치 있다.
- 스스로 꼽는 진소라의 명장면은 무엇일까
12부까지 내가 나오는 장면 중에서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 장면이 있다. PL그룹 창립기념파티에 가서 오수와 대면하는 신, 오수가 거칠게 내 팔목을 붙잡고 독설을 하고 돌아서면 거기서 내가 '오수야'라고 부르는 장면이 있는데 다른 건 다 망쳐도 이 장면만큼은 정말 잘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수야'라는 이 세 글자가 너무나 많은 걸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 조인성의 여자로 나와 많은 여성 팬들의 질투도 받았는데, 연기 호흡은 어땠나
조인성 씨는 너무나 완벽하다. 질투가 날 정도로 완벽한 분이다. 비주얼을 떠나서 그분이 연기하는 모습이나 현장에서의 매너, 스태프를 배려하는 마음까지.. 정말 대단하다. 모든 걸 갖고 계셔서 흠 잡을 데가 없다. 이제껏 만나본 많은 남자 배우들 중에 성격도 너무 좋으시고, 배울 점도 너무나 많은 분이다.
앞서 말한 '오수야' 하는 신을 찍는데 사실 조인성 씨가 그 전에 손을 다쳐서 상당히 아픈 상태였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아프다는 기색 하나 없이 촬영을 하셨더라. 제가 이렇게 칭찬을 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이제껏 본 남자 배우들 중 최고다.
- 12부에서 공항에서 떠나는 장면으로 퇴장했다. 마지막 촬영 소감은?
떠나는 장면으로 끝나니 아무래도 섭섭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머지 배우들과 스태프는 한창 달려갈 때고 계속 고생을 하셔야 하는데 밝게 인사를 건네기도 어색했다. 이제 막 정이 들려고 하는데 끝나니 아쉬웠다.
오수를 위해 희생을 한다거나하는 식으로 아름답게 떠나고 싶은 건 제 개인적인 욕심이고 저는 갈등을 만들어야 되는 인물 아닌가. 송혜교 언니한테 다 고자질하고 도망간 느낌이지만 (웃음) 드라마의 전개상 그렇게 떠나는 게 맞는 것 같다.
- 그간 주로 밝고 귀여운 역할을 많이 했다. 이번 팜므파탈 캐릭터를 연기한 소감은?
원래 개인적으로는 조금은 다운된 잔잔한 캐릭터를 좋아한다. 밝게 웃고 팔랑팔랑 뛰어다니고, 그런 역할이 잘 어울린다고들 하더라. 데뷔 때부터 그런 역할들을 주로 맡다보니 그런 이미지로만 굳혀지는 게 싫었다. 차분하고 다운된 연기를 하고 싶었고 내 안에서 다른 점을 찾아내고 싶었다. 그런 시점에 '진소라'를 만났다. 이번 캐릭터는 나의 목마름을 채워줬던 것 같고 특별 출연이지만 내 안에 감정들을 많이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연기하면서 행복했다.

- 그렇다면 차기작은 어떤 구상을 하고 있나
너무 강한 역은 피하고 싶긴 하다. 제 외모 이미지 자체가 키도 크고 도회적인 느낌이 강하다고들 하시는데 오히려 단벌만 입고 털털한 캐릭터를 맡고 싶다. 어딘가 좀 비어 보이거나 지극히 현실적인 캐릭터들 있지 않나. 조금은 여성스럽고 잔잔한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역할도 하고 싶다.
그래서 최근엔 영화에 관심이 많다. 영화의 경우 내가 원하는 캐릭터를 할 수 있는 무대가 많은 거 같다. 드라마보다는 현실적인 것도 많고, 저예산, 독립 영화 같은 작품에도 관심이 있다. 사람 사는 얘기, 다양한 역할을 해보고 싶다.
- 배우로서 앞으로의 목표나 바람이 있다면?
처음 배우 일을 시작했을 때 서른 살이라는 나이를 목표로 잡았었다. 20대 때의 내 꿈은 연기자였고 그걸로 주목 받는 거였다면, 30대엔 훌쩍 떠날 수 있는 마음이 되기를 기도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도 스포트라이트에 익숙하고 인기에 연연하지 않기를 바랐다. 이제 30대에 들어섰는데 작년에 연기를 좀 쉬면서 고민이 많이 줄었다. 이제 조금은 편하게 연기를 하고 싶다. 조급함을 버리고 나를 위한 시간도 쓰고 싶다. 20대 중반에 데뷔해서 바쁘게 지내오느라 시간을 제대로 내지 못했던 거 같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 내가 어떻게 나이를 먹어 가는지 온몸으로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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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용호 기자 spjj@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