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송혜교에게 SBS 수목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이하 그겨울, 극본 노희경, 연출 김규태)는 고마운 작품이다. 지난 5년간 안방극장에서 두문불출하며 연기 갈증을 강하게 느낄 무렵 이를 해소해준 작품일 뿐만 아니라, 더불어 연기 잘하는 배우 타이틀까지 얻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양손에 이 같은 떡을 쥐기까지 과정은 쉽지 않았다. ‘그겨울’ 속 송혜교가 연기한 오영 캐릭터는 시각장애와 함께 절망이라는 마음의 병을 앓는, 깊은 우물을 파야만 만날 수 있는 어려운 상대였다. 게다가 끝없이 파고들어가는 감정 연기를 요구하는 작가 노희경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16회 여정을 마친 현재 송혜교는 오영 캐릭터에 밀착된 모습으로 어느새 시청자와 가장 가까운 곳에 다가와 있었다. 송혜교가 시청자의 가슴 속에 배우로 깊은 뿌리를 내리는 순간이었다.

- ‘그겨울’ 하면서 호평이 쏟아졌다
“칭찬은 받을 때마다 좋다. 이번에 특히 많았는데 ‘이게 맞나’ 싶기도 했다. 어색하고 무섭기도 했지만 그보단 신나서 했다. 예전엔 기사들을 멀리했다면 이번엔 찾아서 보곤 했다.”
- 반응이 좋을 거라고 예상했나?
“1,2부를 음악 없이 편집된 걸 봤는데 재밌었다. 10분 정도 봤다고 생각했는데 1회가 다 가버린 거였다. 느낌이 좋았다. 잘 돼서 정말 다행이고 기쁘다.”
- 조인성과의 호흡은?
“어릴 때 사석에서 술도 마시고 했던 사이다.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친해지는 과정 없이 바로 몰입할 수 있었다. 이십대 중반에 한 작품에서 만났더라면 부딪쳤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때는 내 것만 보이는 때 아닌가. 장면에 있어 누가 더 중심이 돼야 하는지 그런 걸 전혀 모를 때다. 다행이 작품을 해석하는 눈이 생긴 상황에서 만나 주거니 받거니 할 수 있었다. 호흡이 좋았다.”
- 하지만 시각장애인 역할이라 조인성과 눈 맞출 기회도 없었다
“눈빛 교감이 안 돼서 초반엔 어려웠다. 눈을 안 보고 연기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조인성 씨가 잘 맞춰줬다. 또 나중엔 습관이 되니까 보는 것 말고 들으면서 연기하는 게 편하더라.”
- 조인성의 연기에 대한 평가는?
“눈을 못 보니까 모니터로 보곤 했다. 조인성 씨의 연기를 봄에 있어서는 나도 시청자였던 셈이다. 또 감독님이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그림을 뽑아내는 경우가 많아서 방송이 매우 궁금했다. 여성시청자들이 몰입하듯이 나도 빠져들더라. 연기적으로 남자 배우인데 여배우 보다 감정 표현을 풍부하게 한다. 신기하고 마음 아팠던 장면이 많았다.”
- 김범·정은지와의 호흡은?
“같이 하는 신이 많지 않았다. 대신 사석에서 짧게 대화했는데 김범 씨는 애늙은이더라(웃음). 생각이 많고 깊다. 나와 나이차가 나는데도 대화가 잘 됐다. 은지는 지금 나이 또래의 해맑고 천진한 아이 같다. 시원시원했고 자존심 그런 거에 사로잡히기보다 자기 단점을 고민으로 털어놓는 아이다.”

- 노희경 작가와의 두 번째 호흡 만족하나?
“‘그들이 사는 세상’ 보다는 성공한 것 같다. 당시에는 노 작가님의 극본이 생활대사라고 생각해서 쉽게 보고 들어갔다가 된통 당했었다. 그래서 이번에 철저하게 준비했다. 두 번째 만남인데 좋은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 노 작가 작품은 어렵기로 유명하지 않나?
“정말 어렵다. 다른 작품의 감정이 1,2 정도면, ‘그겨울’은 4,5,6,까지 치고 올라갔다. ‘그들이 사는 세상’도 어려웠지만, 이번 같은 경우 멜로의 끝을 친 기분이다. 특히 나는 감정 연기가 첫 번째나 두 번째 테이크에서 다 나오는 편이라 끊지 않고 그걸 계속 이어가야 했다. 그래서 하는 동안 너무 지치기도 했지만 하다 보니 오영에게 많이 몰입이 됐다. 육체적으로는 괜찮았는데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 그래도 노 작가가 크게 칭찬했다
“이번 작품에선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 ‘그들이 사는 세상’을 할 때는 사실 통화를 한 번도 안 했다. 당시 내가 헤매서 안 건드리려고 그러셨던 것도 있을 거다. 이번 작품에서는 작가님이 보시고 괜찮다 싶은 것에 대해선 연락을 해 주셨다. 그런데 나는 선생님이 칭찬을 해주시면 어색해서 ‘아니에요’ 했는데, 칭찬도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시더라. 기억해서 다음번에 연기할 때 이용하라는 뜻이었다. 보완할 점도 지적해주셨는데 노력해서 고치고 싶다.”
- 부상투혼도 있었다던데?
“6회 방송을 촬영하는 중에 새끼손가락을 다쳤다. 차 앞에서 오열하는 신이었는데 문 닫다가 새끼손가락이 끼었다. 차가 너무 좋은 차인 바람에 끝까지 다 닫혀서 손톱이 새카맣게 변해버렸다. 보기 흉해서 살색 매니큐어를 바를까 했는데 시각장애인이 매니큐어 발랐다고 뭐라고 할까봐 못 바르고 있었다. 아파 죽는 줄 알았다(웃음).
- 오수가 친오빠가 아닌 걸 아는 장면에서 굉장한 감정연기가 필요했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드라마가 좋은 게 초반부터 촬영하다 보면 그 인물에 다가가게 된다. 1부부터 감정을 쌓아왔고 그 장면은 내가 오영이 된 후라 절로 몰입이 됐다.”
- 오수에 대한 배신감을 꾹꾹 누르면서 연기하더라
“영이는 감정을 폭발시키는 게 어색한 애다. 어릴 때부터 뭔가를 얘길 해도 들어주지 않는 아빠를 가졌고, 눈이 안 보여도 병원에 데려가지 않는 왕비서 곁에서 자랐다. 자기 마음대로 된 게 없는 아이인 만큼 혼자 삭히는 법을 배웠던 거다. 영이는 아마 분노를 터뜨리는 방법을 모를 거다. 그런데 그걸 연기하는 게 정말 힘들었다. 그런 신들 끝나고 나면 아무 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집에 와도 쉬는 게 아니었다.”
- 그런데 우는 장면에서 어떻게 그렇게 예쁠 수가 있나?
“아니다. 예전에는 눈물이 또르르 떨어지면서 예쁘게 울었는데 요즘엔 콧물이 난다. 나이 들어 그렇다고 하더라(웃음)”
- 송혜교에게 ‘그겨울’은 어떤 작품인가?
“모험 같다. 이후 작품에서 내가 망하더라도 또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작품이랄까? 왜냐면 난 모험을 좋아하고 또 할 것이기 때문이다.”

- 모험은 유독 영화에서 많이 한 듯 하다. 쉽지 않은 영화에 출연해왔다
“결과를 보고 선택하지는 않으니까. 잘 될 거라고 생각하고 하는 건데 안 된 거다. 희한하게 영화에서는 잘 안 됐다. 하지만 나는 이제 30대 초반이고 시간도 충분하니 영화 쪽에서도 좋은 반응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 모험의 하나였던 왕가위 감독의 ‘일대종사’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4년 전 다른 작품 이야기 하고 있었는데 엽문의 일대기라며 제안 받았다. 비중이 크진 않지만 강인하고 아름다운 역할이고 ‘네가 꼭 해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 주변에서 말리는 사람이 많았다. 현지에서 들리는 얘기로 왕 감독님 작품은 유명 배우도 다 편집 당하고 두 컷만 나오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대포로 했다. 놀고 있을 바엔 뭐하나 싶은 생각이었다. 현장에 있으면 뭐 하나라도 배우겠지 싶었다. 또 거장의 작품이 아닌가. 그 현장이 궁금했다. 다른 하나는 그래도 한국에서 인기 있는 배우인데 설마 그렇게 대접할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4년이 걸릴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 어떻게 그 긴 시간을 버텼나?
“몇 번을 때려치우고 싶었다. 불러놓고 한 달 동안을 촬영 안 할 때도 있었으니까. 그쪽 배우들은 몇 번 해봐서 여유가 있던데, 나는 한 번도 안 해봐서 당황스러웠다. 뭐하고 있는 건가 수백 번 생각했고, 한국에서 좋은 작품들 다 버리고 왜 이러고 있나 싶었다. 3년쯤 지났을 때는 이러다가 독한 말이 나오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만 두면 더 창피할 것 같았고 그러다 촬영이 끝났다. 중국에서 개봉할 때 현지에서 연락이 왔는데 6분 나왔다고 하더라. 그런데 짧지만 임팩트 있는 신이라고 했고, 현지사람들이 내가 연기한 엽문 아내의 느낌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특히 엽문의 아들이 어머니를 아름답게 표현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 ‘일대종사’를 4년간 촬영하며 뭘 얻었을까?
“결과로만 봤을 때는 아쉬울 수도 있지만 4년 간 내가 쌓아온 시간을 돌아보면 다치면서 성숙해진 것 같다. 그러면서 앞으로 나간 것도 있다. 오랫동안 작품을 안 하다 팬들이나 관계자들이 나를 다시 찾아줬을 때의 감사함도 알게 됐고, 연기 하고 싶은데 못하는 순간의 아쉬움도 알았다. 특히 그 타이밍에 ‘그겨울’을 만났다. 만약 내가 ‘일대종사’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만큼의 열정이 있었을까 싶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느낀 게 있어서 ‘그겨울’에 더 애착을 가지고 했을 거다.”
- 왕가위 감독과 작업한 소감은?
“촬영하는 동안 행복한 순간이 많았다. 왕 감독님이 담은 화면을 모니터 하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나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나 싶을 정도의 순간을 담아내신다. 그런데 그 점이 영화 안에는 안 담긴 게 아쉽다. 감독님이 정말 세밀하셔서 평상시의 송혜교가 나오면 다 NG를 하셨다. 한 컷만 가지고 30번을 가기도 했다. 하다가 소리를 치고 화가 나서 위스키를 들이킨 적도 있다. 작품에는 안 담겼지만 배우로서 내 안에 담겨진 충분한 변화가 있으니 됐다.”
- 앞으로는 오우삼 감독과 하는 작품이 기다리고 있다
“왕 감독님처럼 오래 걸리는 분은 아니라고 해서 다행이다(웃음).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인데 기대하고 있다. 어려움도 있을 테지만 재밌을 것 같다. 나는 도전하는 게 좋다.”
- 도전을 강조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바라봐주는 팬들의 시선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내가 재밌게 하고 몰입해서 해야 보는 분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빗나가는 경우도 생기긴 한다. 하지만 나는 안정적인 캐릭터는 재미가 없다. 뿌듯함이나 보람이 없으면 내가 더 힘들 거라는 느낌이 든다. 노 작가님 작품이 좋지만 안 좋은 점이 바로 이런 거다. 작품 선택하는 게 더 디테일해지고 예민해진다.”
- 삼십대에 접어들었는데 나이에 대한 부담은 없나?
“전혀 신경 안 쓴다. 솔직히 내 나이를 까먹기도 한다. 기사에 게재되는 경우 있는데 그럴 때 알게 된다.”
- 대중이 어떻게 바라봐주길 바라나?
“이번 작품에서 많은 칭찬을 해주셨지만 ‘그겨울’ 같은 작품을 만나는 건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운도 따라줘야 하고 나 개인적으로 부족해질 수도 있지 않나. 너무 많은 기대는 안 하셨으면 좋겠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니까.”
- 앞으로 드라마 많이 할건가?
“물론이다. 하지만 여유가 없이 돌아가는 작품이라면 고민할 것 같다.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완성도가 있어야 보는 분들도, 또 나도 열심히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험을 안 해봤으면 모르겠는데 좋은 촬영 환경을 경험하다 보니 아무래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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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형 기자 soul1014@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