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에서도 신고선수 제의가 온 것은 맞아요. 그런데 바로 1년 선배들인 (박)병호 형이나 정의윤 선배 계약금이 엄청났거든요. 그 선배들에 대한 기대치가 어마어마한데 신고선수인 제게 기회가 갔을까요”.
두산 베어스의 중심타자로 자라난 동시에 이제는 부동의 국가대표 타자가 된 김현수(25)가 미지명 신고선수 출신이라는 것은 두말 하면 입 아픈 사실이다. 그런데 만약 김현수가 현 소속팀 두산이 아닌 롯데 혹은 LG에 입단했다면 그의 현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신일고 시절 덕수고 김문호(롯데)와 함께 당해연도 최고 좌타자로 꼽히던 김현수는 당시 이름값에 걸맞지 않게 드래프트에서 지명 받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두산에 신고선수 입단한 김현수는 2007시즌부터 주전 라인업에 포함되더니 2008시즌 3할5푼7리 타격왕이 되며 정상급 좌타자로 자리잡았다. 최근 몇 년 간 성장세가 정체되었다는 평도 나왔으나 김현수는 한창 나이의, 통산 3할1푼9리의 타율을 자랑하는 한국 야구의 현재이자 미래다.

2005년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대표팀 멤버 중 유이한 미지명 선수였던 김현수. 그것도 나머지 한 명은 안산공고 2학년이던 좌완 김광현(SK)이라 사실상 김현수만이 드래프트 지명을 받지 못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당시를 돌아본 김현수는 “PC방에서 지명 결과를 친구들과 보다가 5라운드 이후로도 내 이름이 안 나와서 대표팀 숙소로 들어갔다. 그런데 결국 지명받지 못했고 드래프트 장소에 가셨던 아버지께서 그날 술을 많이 드셨다. 같이 대표팀에 있던 (김)문호가 지명받지 못한 내게 미안해 아무 말을 못하고 있어서 내가 먼저 축하한다고 말했었다”라고 밝혔다. 김문호가 공수주를 두루 갖춘 외야수로 평을 받았다면 김현수는 또래 중 가장 컨택 능력이 뛰어난 타자였다. 김현수의 미지명과 관련해 한 야구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롯데가 김문호와 김현수를 놓고 고민하다 ‘김문호가 앞 순번에서 뽑히면 김현수를 뽑자’라는 전략을 놓았다고 하더라. 그런데 2차 지명 2라운드까지 김문호가 지명을 받지 못해 롯데가 김현수 대신 김문호를 찍었다. 그리고 나서 김현수는 지명을 받지 못했다”.
만약 김문호가 롯데 3라운드 순번 앞에서 뽑혀 김현수가 대신 롯데 지명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2006년 상무에서 제대한 이승화와 2007년 제대한 이인구, 2003년 1차지명 좌타 유망주였던 박정준(넥센) 등과 경쟁했을 가능성이 컸다. 김현수 프로 입문 이듬해인 2007년 2차 4라운드로 입단했던 현재 롯데 주전 우익수 손아섭과도 겹쳤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2차 지명 미지명 후를 돌아보며 “대학에서의 입학 제의도 있었으나 프로로 가고 싶었다”라고 이야기 한 김현수는 두산만이 아니라 LG에서도 신고 선수 입단 제의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현수는 자신의 프로 생활 장래를 생각하고 LG 대신 두산을 택했다고 밝혔다.
“제 1년 선배들인 박병호(넥센) 선배와 정의윤 선배가 LG에 있었는데 다들 계약금을 많이 받고 입단한 선배들이었어요. 계약금 2억, 3억 넘게 받고 들어온 형들(박병호-3억3000만원, 정의윤-2억3000만원)이 있는데 제가 신고 선수로 가서 그 곳에서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싶었거든요. 대신 두산은 주전 라인업에 베테랑 선배들이 많아 세대교체 가능성이 높았고. 그래서 두산을 택했습니다”.
2006년 2군에서 가능성을 보여줘 시즌 도중 정식 계약에 성공한 김현수는 미야자키 교육리그서부터 김경문 당시 감독(현 NC 감독)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2006년 두산은 페넌트레이스 5위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가을 야구에 초대받지 못한 대신 김 감독은 교육리그 현장을 찾아 향후 중용할 만 한 유망주를 찾았고 눈에 띈 김현수는 이듬해 전지훈련도 함께 했다.
2007시즌을 앞두고 시범경기에서 유재웅(은퇴)이 발목 부상을 당했고 그 자리를 김현수가 메우며 시즌 초반 출장에도 성공했다. 주전으로 도약한 시발점. 신고 선수 입단 제의 속 자신의 장래를 심사숙고해 두산을 선택한 김현수는 혜안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1군 엔트리에 들고 2007년 첫 출장 경기(4월 8일 대구 삼성전) 때 선발 투수가 임창용(시카고 컵스) 선배였어요. 어떻게 치나 긴장되고 초조했는데 그날 어떻게 하다 보니 안타도 쳤고 그것이 타점으로 이어졌어요. 한화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 때는 앞선 타석에서 결과가 안 좋아 위축되었는데 감독님께서 ‘믿고 있다. 너 도중에 안 뺄 테니까 겁 먹지 말고 자신있게 휘둘러’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나서 정민철 코치님 상대로 홈런을 쳤었어요. 홈런 치고 나서 얼떨떨해서 물을 한 세 통 먹은 것 같아요”.(웃음)
지나간 일에 대한 가정은 사실 부질없는 일이다.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최고 유망주가 부상과 성장 정체 속 소리 없이 은퇴하는 경우도 있고 김현수처럼 시작이 또래들보다 다소 불리했다고 하더라도 부단한 노력으로 제 입지를 확실히 구축하는 경우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김현수가 미지명 불운 속에서 자신의 진로를 신중하게 선택한 뒤 성실한 자세로 야구에 임하며 지금의 위치에 올라섰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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