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중에는 몰랐다. 그런데 경기가 끝나고 난 뒤 곰곰이 생각해보니 꿈만 같은 일이었다. “내가 시구자의 공을, 그것도 두 번이나 받게 될 줄이야”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주전 1번 타자가 아니라면 누릴 수 없는 특혜였다. 이를 회상하는 이명기(26, SK)의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가 돌았다. 그의 달라진 위상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이명기가 자신을 가둬놨던 알을 깨뜨리고 있다. 이제는 세상과 인사도 마쳤다. 신고식을 넘어 히트 예감도 강하다.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수치만 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가진 잠재력이 서서히 표출되고 있다는 것은 성적 이상으로 고무적이다.
시작부터 범상치 않았다. 보통 각 팀의 스프링캠프는 1·2차로 나뉜다. 1차 캠프에서는 팀 플레이 훈련 등 기본을 정비하고 2차 캠프에서는 실전 위주로 감각을 끌어올리게 된다. 각 캠프의 주안점이 다르기에 보통 1차 캠프 MVP가 2차 캠프까지 활약을 이어가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이명기는 올해 SK의 1·2차 캠프 MVP를 모두 거머쥐었다. SK 팀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그만큼 성장세가 가팔랐다. 인천고를 졸업하고 2006년 SK에 지명된 이명기는 뛰어난 잠재력을 인정받는 유망주였다. 그러나 좀처럼 알을 깨지 못해 주위를 안타깝게 한 선수이기도 하다. 매년 봄에는 기세 좋게 1군 무대를 두드렸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2군으로 내려가곤 했다. 이명기는 “2군에 내려가면 의욕이 떨어졌던 부분도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악순환이 반복됐던 이유였다.
그러나 공익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올해는 다르다. 전지훈련의 기세를 시즌 초반까지 이어가고 있다. 6경기에서 타율 4할1푼7리(24타수 10안타) 4타점 1도루를 기록하고 있다. 치열했던 SK 외야 주전 경쟁에서 한 발 앞서 나가는 것을 넘어 이제는 팀에서 없어서는 안 될 선수로 성장 중이다. 전지훈련 당시 “이제는 절박함을 가지고 운동을 한다”고 했던 이명기의 노력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고타율보다 더 주목받는 것은 타구의 질이다. 맞히기 급급한 스윙이 아니다. 이명기가 터뜨린 안타의 대부분이 힘이 실린 타구였다. 한편 타구를 잡아당기기도, 결대로 밀어치기도 한다. 플로리다 캠프 당시 SK 선수들을 지도했던 메이저리그 출신 조이 코라 인스트럭터는 이명기의 타격을 두고 “직구와 변화구에 모두 대처할 수 있는 좋은 스윙 궤적을 가졌다”고 극찬했다. 한 스윙 궤적으로 두 가지 상황에 모두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은 선천적인 재능이자 축복이다.
하지만 그런 이명기도 한 번은 위기가 있었다. 시범경기 당시 만난 이명기는 “조금 피곤하다”라고 말했었다. 1군 진입 및 주전 확보를 위해 쉼 없이 전지훈련을 달려왔으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피로도는 당연했다. 이를 극복하는 경험도 많지 않았다. 시범경기에서 다소 부진했던 직접적인 이유다.
그러나 이명기는 이를 슬기롭게 잘 극복했다. 이명기는 “페이스가 조금 처져 운동량을 조금 줄였다. 타이밍이 조금 늦는 것 같아서 이를 잡기 위해서도 노력했다”고 말했다. 단순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저 직구를 기다리다 변화구가 들어오면 그 때 변화구 대처에 나섰다. 처음부터 스스로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할 만한 요소를 최대한 줄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초심을 간직하는 것이다. 주위의 칭찬 및 팬들의 관심에 고마워하면서 들뜨지 않으려고 자신을 다잡고 있다. 이명기는 “아직 갈 길이 있다. 초심은 잃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자신했다. 한걸음 한걸음 묵묵히 전진하겠다는 각오다. 이런 마음가짐을 잃지 않는다면 이명기의 활약은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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