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의 테마토크] 빠른 전개는 몰입도를 돕지만 진부한 설정은 기대감을 반감시킨다. 충분히 전개와 결말이 예측되는 드라마다. 지난 3일 새롭게 막을 올린 MBC 수목드라마 '남자가 사랑할 때'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2회 11%의 높은 시청률을 올리며 향후 수목극의 판도를 쥐락펴락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송승헌 때문이다.
지난 1995년 모델로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 이듬해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으로 연기자로 첫발을 내딛은 송승헌은 17년째 배우생활을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대표작이 없다. 고작해야 '가을동화' 정도인데 마지막회 무려 42.3%의 시청률을 올린 이 드라마는 그 누가 봐도 윤석호 PD의 작품이지 송승헌이 완성한 작품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역시 아직까지 송승헌은 잘 생긴 배우로는 유명하지만 대표작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남자가 사랑할 때'는 달라 보인다. 정확히 이 드라마 속 그가 연기하는 한태상은 특별하다. 송승헌이 변한 것이다.
한태상은 어려서 어머니가 바람이 난데다 사채까지 끌어쓰고 도망가는 바람에 아버지의 자살로 가정이 풍비박산난 과거를 가졌다. 그래서 사채업자들에게 야무지게 대드는 그의 모습이 보스(이성민)의 눈에 들어 스카웃돼 그의 보살핌으로 어느덧 조직의 2인자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는 보스의 무식하고 고루한 사업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보스의 높은 이자율만 책정해 놓고 빚을 갚지 못하면 채무자에게 행패를 부리는 고전적인 방식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하며 보스에게서 어긋나고 있었다.
어느날 그가 가난한 책방 주인 서경욱(강신일)에게 밀린 돈을 받으러 갔다가 그의 딸 서미도(신세경)를 발견하고는 행패를 부리는 부하들을 만류하고 되돌아온다. 그리고 그는 서경욱의 빚에서 이자를 탕감해주고 더 나아가 서미도의 대학 학비까지 넉넉하게 대준다. 하지만 서미도는 아버지가 입원하는 바람에 한태상의 돈을 입원비에 쓰느라 항상 돈이 모자란데다 졸업 후 유학을 다녀오지 못했단 이유로 번번이 취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이탈리아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보스는 자신의 연인 백성주(채정안)가 한태상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한태상에게 강한 질투심과 패배감을 느끼고 있던 차 전 조직원들이 모인 자신의 생일파티에서 한태상이 싫어하는 어머니를 거론하며 모욕을 준다. 그러자 한태상은 분노를 폭발하고 보스에게 등을 돌린다.
보스는 사람들을 사서 한태상 테러를 명령하지만 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한태상의 마음 속에 담긴 서미도를 납치해온다. 한태상은 서미도를 피신시키는 과정에서 보스에게 칼을 맞고 쓰러지고 뒤늦게 달려온 한태상의 오른팔 이창희(김성오)가 보스를 죽이고 한태상을 구해준다.
이창희는 하늘 아래 가족이라고는 동생 이재희(연우진) 밖에 없다. 다행히 이재희는 깡패인 자신과는 달리 공부를 잘 해서 이창희는 거기에 희망을 품고 살아가고 있던 터. 이창희는 살인죄로 감옥에 가고 남은 한태상은 이재희의 뒷바라지를 해서 그의 유학까지 돕는다.
그리고 한태상은 타고난 사업수완을 발휘해 레몬 트리라는 자신의 회사를 차리고 국제적으로 비지니스를 펼치는 능력있는 사업가로 우뚝 선다.
이 드라마 속에는 누아르와 멜러가 함께 녹아있다. 제목은 멜러를 표방하지만 내용은 진한 남자들의 피와 땀이 범벅이 된다. 한태상과 이창희는 서로 살인죄를 뒤집어쓰겠다고 희생정신을 보이며 진한 의리를 발휘하고 결국 진범인 이창희가 감옥에 간다. 그는 잡혀가기 전 이재희와 밥을 먹으며 "형이 돈 벌러 외국에 몇년 나가있을 것이니 한태상 형님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고 거짓말을 하지만 형의 옷에서 피를 발견한 이재희는 진실을 말하라고 형을 압박한다.
그러자 이창희는 울먹이며 "형 좀 믿어주면 안돼? 너보다 잘난 것 없어도 그래도 형인데 그러니 묻지 말고 믿어주면 안돼? 믿고 기다려주면 안되겠어?"라고 울먹인다. 남자들의 진한 의리가 묻어나오는 대목이다.
한태상은 비록 거칠고 척박한 건달세계에서 생활한 남자이지만 사랑 앞에서만큼은 순수하고 인간적이다. 그는 처음 서점에 갔을 때 두려울 것 없이 저항하는 서미도의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을 봤다. 처음에는 연민의 정이었다. 동질감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빚을 청산하는 대신 자신을 주겠다고 하자 그녀에게서 여자를 느끼게 됐다. 당돌하다 못해 무모하기까지 한 그녀를 되돌려 보내고 오랜 세월 그녀와 떨어져있는 동안 어느덧 그는 가슴 한켠 깊은 곳에 서미도를 심었다.
비록 한태상이 밑바닥 인생 출신이라고 하긴 하지만 성공한 국제 사업가고 서미도가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딸로서 부자를 동경하는 '청담동 앨리스'의 한세경(문근영)같은 캐릭터 설정은 천편일률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나 할리퀸 멜러의 전형적인 구조다. 그럼에도 한태상과 서미도의 멜러에 집중하게 되는 것은 바로 송승헌의 빠져나오기 힘든 매력 때문이다.
사실 신세경의 데뷔는 신선했다. 하지만 트렌드는 변하기 마련이다. 이제 더 이상 그녀의 마스크는 상큼하지 않고 눈에 익을대로 익었는데 새로운 신인들은 쏟아져 나오고 송혜교 김하늘 손예진 등 기존 여배우들은 무르익은 연기력으로 승부수를 띠운다. 신세경이 내세울 카드가 약하다는 의미다.
하지만 송승헌은 처음으로 대표작을 만난 듯 불과 1년 전의 '닥터 진'과는 사뭇 다른 날카로움과 강렬함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불친절하고 개연성이 부족한 스토리 전개와 상황설정에도 불구하고 송승헌의 이유 없는 상반신 노출이 결코 얼굴 벌개지거나 불필요하다고 느껴지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은 군살이 빠진 각진 그의 얼굴에서 어느덧 세월의 연륜이 보이고 눈빛과 입술의 움직임에서 연기의 내면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얼굴의 변화는 그동안 공통적으로 지적되던 송승헌의 일관된 표정연기가 바뀌어 총천연색으로 다변화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사실 그의 표정에서 희노애락의 변화가 확실하게 표현된 게 언제인가 싶을 정도로 그는 표정연기가 약했다. 하지만 그는 시선처리와 눈빛의 조도 조절이 가능해졌고 목소리 톤의 조정이 다양해졌다. 그건 연기력이 자리잡혔다는 뜻이다.
나이가 벼슬이나 훈장은 아니지만 올해로 서른일곱 살을 맞은 송승헌은 변해도 확실하게 변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다. 그의 동갑내기 차태현과 장혁에 비해서라면 다소 성장이 더디다고 볼 수 있는데 반면에 늦은 만큼 그 깊이와 넓이는 사뭇 수준이 다르다. 최소한 그가 코믹연기로 차태현을 이길 순 없지만 '아이리스2'의 장혁과 비교해선 절대우위다.
이 드라마에서 누아르의 냄새가 난다고 표현한 것은 스토리나 화면의 톤이 '영웅본색'이나 '신세계'나 '대부'같아서가 아니라 바로 송승헌이라는 '남자'가 있기 때문이다. 통속극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진부한 스토리 전개와 뻔한 결말이 예고되는 점 등은 이 드라마가 가진 가장 큰 한계이자 결점이다. 그럼에도 드라마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송승헌이 한낱 삼류깡패에서 어떻게 '귀여운 여인'의 리처드 기어같은 키다리아저씨가 돼 얼마나 멋진 신사의 품격을 풍기고 얼마나 땀냄새 진한 남자의 향기를 풍길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언론인, 칼럼니스트] ybacchu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