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은 신현규(48) 중앙대 교양학부 교수의 ‘발굴 한국야구사’ 관련 기고문을 두 차례 나눠서 싣는다. 신현규 교수는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1922년에 사상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 단 한차례 이뤄졌던 한국대표선수들과의 구체적인 경기 내용과 기생들의 조선노래와 춤을 곁들인 서울 명월관에서의 성대한 환영회 모습 등 여태껏 알려지지 않았던 뒷얘기를 발굴, OSEN을 통해 야구팬들에게 소개한다.
신현규 교수는 한국기생사 연구의 권위자로 를 비롯해 , , , 등 고려와 조선의 역사서, 근대의 기생 풍속관련 책을 펴낸 바 있다. [편집자주]

미국 ‘직업야구단’ 선수들, 1922년 12월 7일 남대문역에 도착하다
봄입니다. 무엇보다 보고 싶은 프로 야구가 시작되었기에, 신납니다. 올해는 LA 다저스의 류현진과 신시내티 레즈의 추신수 때문에 메이저리그 경기도 자주 볼 수 있어서 더욱 흥미진진합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우리가 메이저리그 경기를 관람했을까? 그 의문은 1922년 12월 8일 용산 만철 구장에서 열린 조선야구단과 미국직업야구단의 경기 기록에서 풀렸습니다. 프로야구가 성행하는 요즘에도 성사가 어려운 그들의 방한 친선경기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그 배경에는 초창기 한국 야구계의 두 인물의 노력과 헌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1922월 12월 7일, 미국 직업야구단(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일본 규슈 나가사키항을 출발, 부산항에 내린 뒤 열차편으로 서울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도착, 사상 처음으로 이 땅을 밟았습니다. 1904년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황성기독청년회(YMCA)에서 회원들에게 야구를 처음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이후 18년만의 일이었습니다.
그 이튿날인 12월 8일에 한국야구단과 경기를 가진 후 저녁에는 서울 명월관(지금의 롯데시네마피카디리극장 자리) 2층 특1호실에서 미국 선수들의 환영식이 열렸습니다.
지금 여전히 우리에게 스포츠 영웅으로 남아 있는 박찬호, 그가 활약했던 미국의 메이저리그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의 양 리그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빅 리그(big league)라고도 하지요. 현재 소속팀들은 팀당 162경기를 벌이는 정규시즌을 가진 후 플레이오프, 월드시리즈를 거쳐 우승팀을 가립니다.
야구는 1860년대 미국 전 지역에 걸쳐 대중적인 운동으로 자리 잡아, 1869년 최초의 프로구단 신시내티 레드 스타킹스(Cincinnati Red Stockings)가 창단되면서 시작되었지요. 1875년에는 세인트루이스와 루이빌(Louisville) 등의 야구클럽 대표단의 모임에서 현재의 내셔널리그의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1882년에는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American Association)이라는 새로운 리그가 창설되어 비로소 내셔널리그와 경쟁하였습니다. 이를 전신으로 1901년에는 아메리칸리그가 창설되어 오늘날과 같은 내셔널리그 및 아메리칸리그의 양대 리그체제를 갖추게 됩니다.
1903년에는 양 리그의 우승 팀 간에 월드시리즈가 처음으로 벌어졌습니다. 월드시리즈의 도입은 리그제의 도입과 더불어, 프로야구를 전 국민적인 열광과 관심을 모으는 미국 최고의 인기스포츠로 자리를 굳혔습니다.
가장 미국적 스포츠이기에 메이저리그 팀들은 1920년대부터 전 세계에 야구를 보급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 시절에 우리나라에도 메이저리그 올스타팀이 시범경기를 위해 방문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미국직업야구단’ 이름으로 알려집니다. 본래 이들 메이저리거들은 일본 도쿄에서 만주를 거쳐 상하이로 갈 예정이었답니다. 당시 조선체육회 이사이면서, 전 YMCA 야구단 선수인 이원용과 동경 유학생 학우회 야구부의 선수 박석윤이 일본에 건너가 교섭 끝에 조선선수단과의 경기 일정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직업야구단이 멀리 조선까지 와서 12월 8일 우리 전조선야구단과 경기를 마친 후에 미국 선수들은 각각 자동차에 올라 숙소인 조선호텔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날 저녁 8시가 되자 주최자인 전조선야구단이 명월관으로 미국직업야구단 일행 20여명을 초대하여 환영회를 열었지요.
미국 직업야구단 일행을 인솔하며 조선까지 오게 된 감독이 바로 헌터(Hunter)였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야구계에 명성이 있었지요. 미국 안에서는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까지 가서 야구를 위하여 많은 힘을 쓴 이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헌터 감독은 1920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과 게이오 대학의 야구 담임 교수로 있었습니다.
헌터는 1922년에 마이너리그 트리플A 선수를 주축으로 메이저리그 선수 3명이 포함된 미국 올스타 팀을 이끌고 일본에 이어 조선을 방문했습니다. 메이저리그 선수 3명은 1922년 뉴욕 양키스의 투수 ‘웨이트 호이트’(Waite Hoyt, 1899~1984), 보스턴 레드삭스의 투수 ‘허브 페낙’(H. Pennock, 1894-1948), 뉴욕 자이언츠의 1루수 ‘조지 켈리’(George Kelly, 1895-1984) 등이었지요. 이들은 뒷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는 현역 메이저리거들이었습니다. 미국직업야구선수단은 이들이 들어 있었기에 더욱 강한 팀이었습니다.
1922년, 잿빛의 하늘이 찬바람으로 너울져 있던 한옥 처마에 이제 서너 개 남아 있는 낙엽마저 떨어지는 12월이었습니다. 그해 종로 거리에는 때 이른 솜옷으로 단단히 옷깃을 동여맨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어느덧 3년이 지난 조선의 12월은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당시 미국직업야구단은 명월관 식당으로 들어가기 전에, 입구에서부터 조선 기생들의 노래를 들었다고 합니다. 아주 생소한 조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미국직업야구단 일행은 12월 8일 저녁 9시쯤에 주최 측이 미리 준비해 놓은 명월관 2층에 올라갔습니다. 미극선수단과 조선선수단이 그 가족들과 함께 자리를 잡았습니다.
우리 조선 춤의 백미인 검무와 승무 외에 여러 기생들의 아리따운 춤을 보면서 미국야구단 선수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예전에 보지 못했던 우리의 옛 기예를 칭찬하기 바빴습니다.
우리 조선의 태고적 풍악 소리는 멀리 와서 하루의 수고를 한 미국직업야구단을 반갑게 맞아주는 듯 했습니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저녁 10시 반이되자 미국직업야구단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숙소인 조선호텔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메이저리그 야구단을 태우러온 자동차가 명월관 문 앞에 기다렸지요. 미국직업야구단은 가기 싫은 걸음을 억지로 옮겨놓았습니다.

미국직업야구단, 명월관 환영회와 헌터 감독의 답사(答辭)
그날 밤 명월관에서 열린 환영회 석상에서 미국직업야구단의 헌터(Hunter) 감독은 이렇게 답사를 했습니다.
“우리가 일본에까지 와서 일본선수와 싸우며 일본선수와 피차의 기술을 다툴 때, 조선으로부터 이원용 선수와 박석윤 선수가 오셔서 우리가 오늘 이 조선이란 땅을 오게 됐습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생각했는데 이처럼 성대한 환영까지 베풀어주시니 우리는 여러분의 열성을 감사하는 동시에 이후에도 변치 말고 오늘 모임과 같은 시간이 다시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 분들이 오늘 이와 같은 모임으로써 우리를 환대하여 주심은 언제나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을 것 입니다. 금번에 우리가 이 조선까지 이렇게 오게 된 것은 피차의 운동을 하여 승부를 겨루고자 함보다도 우리나라와 조선 양국 간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은 피차에 신뢰를 쌓아가며 신애(信愛)를 하여 우리들이 하고 있는 베이스볼로써 이상까지 관철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원래 금번에는 일본만 오게 되었던 것이나 이후에 다시 동양을 오게 될 때에는 반드시 우리가 오늘 여러분들의 사랑을 저버리지 않고 여러 분들을 반가운 낯으로서 손목을 잡고자 하며 또한 새로운 명목을 가지고 다시 국제적 경기를 해볼까 합니다. 어느 때까지 여러분들의 오늘과 같은 열정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당시에 감독 헌터(Hunter)의 답사는 조선과의 친선을 목적으로 삼았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앞으로도 국제적 경기를 하고 싶다는 의지도 명확하게 전달했지요.
헌터 감독의 답사에서 언급된 이원용(李源容, 1897~1971)은 오성학교(五星學校)와 중앙기독청년회 영어반을 졸업하고, 야구선수로서 활약하였습니다. 1917년 봄에 고려야구구락부를 조직했지요. 같은 해 5월 인천에서 원정경기를 가졌으며, 7월에 도쿄유학생야구단과 경기도 한 바 있습니다.
이원용은 1920년 6월 16일 서울 인사동 명월관 지점(옛 태화관)에서 조선체육회 결성을 위한 발기인으로 참석했지요. 같은 해 11월 4일에 조선체육대회의 첫 번째 사업인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배재고등보통학교(현 배재고 전신) 운동장에서 개최할 때 심판을 맡은 분이 바로 이원용이었습니다. 이원용은 미국직업야구단의 경기에서는 루심을 맡아 봤습니다. 그는 1923년 6월에 조선야구협회를 창립에 참여하였고 1932년 9월에는 서정록(徐廷祿)과 함께 월간지 을 창간했던 우리나라 야구와 스포츠의 선구자였습니다.
박석윤(朴錫胤, 1898~1950)은 당시 일본구제고등학교(日本舊制高等學校)의 경도삼고(京都三高) 재학 중에 명투수로서 유명했던 인물입니다. 경도삼고가 전통적인 경도일고와의 정기전에서 3연승한 시기도 그가 투수를 하던 때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키는 5척 4촌(약 162센티)였고, 긴 얼굴형에 거무스름한 피부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당시 전조선야구단의 주장이었던 박석윤은 미국 직업야구단 일행과 함께 경기가 끝난 다음 날인 12월 9일 오전 10시10분 남대문(지금의 서울역) 발 봉천행 급행열차로 개성까지 갔다가 12월 10일 오전에 돌아왔습니다. 그 뒤 박석윤은 동경제대 법과 출신으로, 중앙고보(중앙고 전신)와 휘문고보(휘문고 전신)의 교사로도 잠깐 재직했지요.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국제법을 공부하고 귀국한 뒤 매일신보사 부사장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는 육당 최남선의 매제로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에서 주 폴란드 총영사를 맡을 정도로 한편으론 친일 행적이 논란을 빚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1922년 12월 8일 메이저리그 올스타 선수단의 환영회를 열었던 서울 명월관 모습과 당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줬던 명월관 기생들. (신현규 교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