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한국야구사](하) 전조선군, 메이저리그 올스타팀에 3-23으로 참패하다
OSEN 홍윤표 기자
발행 2013.04.22 11: 19

‘어린아이 손목 비틀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메이저리그 올스타팀은 전조선군을 상대로 애시 당초 실력비교라고 할 것도 없는 초창기 한국야구대표팀을 무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는 무려 23-3이었습니다. 만약 미국직업야구단이 전력을 다했더라면 경기 자체가 성립할 수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1922년 12월 8일, 용산 만철구장에서 전국 조선 야구단과 미국직업 야구단의 ‘맹렬한’ 국제적 게임의 결과는 서로의 실력 차이를 확인할 정도로 처참했습니다. 오후 3시에 주심 모리애리태가 우렁차게 ‘플레이’라고 외치자, 조선 팀의 마춘식 선수가 첫 타자로 나서면서 경기가 시작되었지요. 그러나 4시50분에 끝날 정도로 경기는 일방적이었습니다.
이 경기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 경성전기는 종로에서 신용산으로 통하는 전차노선에 임시열차까지 배차했지요. 입장료는 지정석 5원, 일등석 3원, 이등석 2원, 삼등석 1원, 학생 50전이었습니다. 당시 쌀 한 가마니 값이 28원이었으므로 적지 않은 금액이었습니다. 그래도 관중은 꽉꽉 들어찼고, 총 입장 수입은 1700원이나 되었지요.

그날 조선 팀은 박석윤(朴錫胤) 투수가 완투했지만, 총 23실점을 했습니다. 반면 미국 팀은 프쉴과 허브 페나크 두 투수가 교대로 던졌지요. 이 두 투수는 전조선 팀 타선을 상대로 단 3점만을 내주었습니다. 20점이면 사실 엄청난 점수 차였습니다. 지금의 콜드 게임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렇게만 본다면 조선 선발 투수 박석윤 선수가 너무 못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조선의 실책이 무려 10개에 달하는 것을 보면 7, 8점 정도는 내주지 않아도 될 점수였지요. 미국 올스타 팀은 마이너리그 트리플A 선수를 주축으로 메이저리그 선수 3명이 들어 있었습니다. 더구나 선수의 아내들 5명까지 합쳐서 23명의 선수단이었지요.
당시 우리나라를 찾았던 미국 팀에 대해 선수들 구성만 놓고 따진다면 ‘메이저리그 올스타’라고 부르는 것에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999년 대한야구협회, KBO 공동 펴냄) (2010년 대한체육회 펴냄)는 ‘메이저리그 올스타’로 공식화 했고 당시 메이저리그 최정상급 선수 3명이 투수와 1루수를 맡아봤다면 비록 친선경기(실제로는 보급 활동 차원)였긴 하지만 그렇게 불러도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메이저리거 3명은 뉴욕 양키스의 투수 웨이트 호이트(Waite Hoyt. 1969년 명예의 전당 헌액)로 그해 19승 12패, 평균자책점 3.43이었고, 보스턴 레드삭스의 투수 허브 페나크(H. Pennock. 1948년 명예의 전당 헌액)는 10승 17패를 기록했던 뛰어난 투수였지요. 전조선군과의 경기에서 페나크가 7회까지 무실점으로 던집니다. 뉴욕 자이언츠의 1루수 조지 켈리(George Kelly. 1973년 명예의 전당 헌액)도 이들과 함께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된 강타자였습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하버트 헌트(H. Hent)는 미국의 감독 겸 선수 주장이었지요.
미국팀은 홈런을 3개 때렸습니다. 실력 차가 워낙 컸기 때문에 전조선군은 대량 실점을 피할 수 없었지요. 전조선군의 3루수 이석찬(李錫贊)은 3타수 1안타(2루타)를 기록했으나 실책을 4개나 범하는 바람에 질책성 교체되었습니다. 잡아준 아웃이 1개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교체되어 들어온 정원복은 볼넷을 얻어내서 출루한 다음 득점까지 연결했지만 역시 실책 1개가 있었지요. 조선은 핫코너인 3루 쪽에서 실수를 연발하며 자멸했습니다. 후보 선수였던 장의식, 김종세, 김성환 중에 김성환만 출전하지 않았습니다.
전조선군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는 좌익수 김정식(金貞植)이었습니다. 그는 2타수 2안타로 조선 선수 가운데 유일하게 멀티히트를 기록했습니다. 내용 면에서도 2루타에 1득점까지 하였으니, 요즘으로 따지자면 추신수 쯤 될 듯 보입니다. 이 경기에서 조선은 총 6안타를 기록하며 경기를 마감했습니다.
반면 미국은 역시 야구의 강대국답게 장단 20안타로 조선 마운드를 맹폭했습니다. 교체도 투수 이외에는 없었지요. 두 투수가 전조선군 타선을 틀어막은 것도 돋보이지만, 타자 중에 그리피드가 특히 눈에 띕니다. 그리피드는 5타수 3안타에 홈런 1개, 2루타 1개, 볼넷 1개, 4득점을 했습니다. 도루도 2개나 기록하며 조선 내야를 뒤흔들었지요. 호타준족인 선수임이 틀림없습니다. 미국의 감독 헌트는 선수 주장으로 5타수 1안타에 도루 1개, 볼넷 1개, 2득점을 했습니다.
미국 팀이 도루 7개로 전조선군 내야진의 얼을 빼는 동안, 조선 선수들의 발은 얼어붙었습니다. 조선 팀의 포수 김태술은 미국 팀의 빠른 발을 묶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기록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미국 포수 소오웨의 강한 어깨에 의해 전조선군의 도루 시도는 여러 차례 저지당했습니다. 삼진도 조선이 5개를 당한 반면 미국은 단 1개뿐이었습니다. 의외로 볼넷 부문은 양국이 비슷했습니다. 조선이 3개를 얻었고, 미국은 4개를 얻었습니다.
결국 경기는 1시간 50분 만에 싱겁게 종료되었고, 결과는 23-3으로 미국의 대승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조선이 미국을 이긴다는 건 100년이 지나도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100년보다 빨리 한국 야구는 9전 전승으로 지난 2008년 베이징올림픽 야구에서 미국을 꺾고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박찬호는 물론 류현진에 이르기까지 한국 선수들이 큰 무대인 메이저리그에서도 당당하게 실력을 뽐내고 있지요.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라고 할 만합니다.
글. 신현규 중앙대 교양학부 교수
미국팀 허브 페낙크, 웨이트 호이트, 조지 켈리(출처 위키피디아)
          전조선군, 전미국군(출처 조선일보 1922년 12월 10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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