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상 엄연히 규칙으로 존재하곤 있으나 경기현장에서 선뜻 적용하기 힘든 몇몇 조항들의 공통점은 상황판단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법은 냉정하게 판단해 칼을 들 것을 요구하지만 재단하는 사람은 자를 부분의 테두리를 어림잡는 일 앞에서 망설이게된다.
가령 도루하는 주자를 잡기 위해 포수가 2루로 공을 던졌지만 루에 야수가 아무도 들어가지 않아 공이 외야로 빠지는 경우, 규칙은 2루 베이스커버에 들어와야 하는 2루수와 유격수 중 한 명을 골라 실책을 부여할 것을 말하지만, 현실에서는 통상적으로 포수에게 그 책임을 묻고 있다.
또한 지금은 꼬투리(?)를 잡아 주자의 도루기록을 원천 무효화시키고 있는 무관심 진루 조항도 과거에는 상황판단의 애매함 때문에 적용자체가 쉽지 않았던 부문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격이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방울 달기가 어려웠던 또 한가지가 있었다. 경기 중 주자가 타구(땅볼, 플라이 타구 불문)에 직접 맞는 경우, 이에 대한 주자의 고의성 여부를 가려내야 하는데 이 일이 쉽지 않았던 관계로 관련규칙이 사실상 사문화되어 왔던 것이다.
야구규칙 7.09 (g)항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주자가 병살을 하지 못하도록 명백한 고의로 타구(또는 야수)를 방해하였을 경우, 심판원은 방해한 주자에게 아웃을 선고하고, 타자주자에게도 동료선수의 방해에 의한 아웃을 선고한다’고.
하지만 주자가 타구에 직접 닿는 경우, 대개는 주자가 피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인 만큼 규칙에 따라 주자만을 자동아웃으로 처리하고, 타자주자는 내야안타로 출루한 것으로 처리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어쩌다 간혹 주자가 굴러오는 타구(안타성 타구가 아님)를 충분히 피해 뛸 수 있어 보이는데도 타구에 닿아 자살성(?) 아웃되고, 타자주자가 안타기록을 챙겨가는 다소 황당한 일이 벌어진 적도 있었지만, 법은 앞서 말한 7.09 (g)항에 규정된 쌍벌죄 적용을 주저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심증은 어느 정도 있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팀의 강력한 반발을 각오하고 주자와 타자주자를 모두 아웃으로 처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편 기록적으로도 주자의 기술적인 타구 접촉시도는 대단히 우려할 만한 일 중의 하나였다. 평상시는 그렇다 해도 투수의노히트노런 기록 등이 걸려있는 중요상황에서 주자가 평범한 타구에 미필적 고의 형태로 접촉을 일으켰을 경우, 투수의 대기록이 허무하게 날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평범한 타구에 주자가 대충 뛰다 맞을 경우,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었음을 전제로 수비방해 조항을 적용해 타자의 어부지리성 안타를 막는 쪽이 좀더 안전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봤지만, 분란을 야기시킬 것이 뻔한 ‘판도라의 규칙상자’를 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 자명한 이상, 현실은 그다지 녹록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지난 4월 18일부산 사직구장 롯데와 넥센의 경기에서는 마침내 그 상자 뚜껑이 열리고 말았다. 넥센이 8-0으로 리드하던 5회 초 1사만루 상황. 이성렬(넥센)이 친 타구가 유격수 정면으로 굴렀다. 타구의 방향과 강도를 고려하면 능히 병살플레이가 가능해 보이는 판국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3루로 열심히 뛰어가야 할 2루주자 이택근이 이 타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과는 주자의 발에 타구가 접촉되며 볼데드.
‘그렇다면 주자 이택근의 아웃은 일단 당연한 귀결인데..., 과연 타자주자 이성열에게는 기록규칙대로 안타가 주어져야 맞는 것일까?’
심판원이 수비방해를 선언하지 않는 이상, 이성렬의 안타기록은 인정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상황. 이택근의 주루플레이 정도가 심해 보이기는 했지만 과거에 타구접촉 주자에게 고의적인 수비방해를 적용, 타자주자까지 괘씸죄로 묶어 아웃시키는 장면을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관계로 아무래도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었다.
이 갈림길에서 심판원은 과감히 칼을 빼 들었다. 주자 이택근은 물론 타자주자 이성렬에게도 아웃선고를 내린 것이다. 8점 차의 리드 폭이 컸던 점도 있었지만 피해자(?)인 넥센 측의 수긍 아래 이닝은 마무리됐고, 프로답지 못한 플레이를 벌인 이택근은 상벌위원회로부터 다음날 제재금이라는 예기치 못한 페널티까지 부과 당하는 신세가 되어야 했다.
벌어진 결과는 이쯤에서 차치하고 이택근은 그날 왜 타구가 몸에 닿을 때까지 기다려 굳이 피하려 하지 않았던 것일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주자의 몸에 타구가 닿으면 볼데드가 되어 자신이 아웃되는 것은 기정사실. 그러나 팀은 병살도 면할 수 있고 여기에 동료 이성렬은 기록상 내야안타까지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기에 가능한 플레이였다. 자신을 희생해 팀을 살리려는 의도는 좋았지만 연기가 너무 어설프고 엉성했다.
이제 오랫동안 굳게 닫혀 먼지가 켜켜이 쌓여있던 상자, 아무도 열려 하지 않았던 그 판도라의 규칙상자 7.09 (g)항 뚜껑이 주자 이택근에 의해 열려졌다. 향후 타구를 향해 어설프게 몸을 댔다가는 화를 배로 사서 부르는 꼴이 될 수 있다. 기우겠지만 하물며 그것이 상대투수의 노히트노런과 같은 대기록과 얽혀 있기라도 하는 날엔 그 충격파는 가히 상상 이상일 수도 있다. 이유불문하고 주자는 부상을 염려해서라도 타구는 일단 피하고 볼 일이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