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적인 어머니상 하면 떠오르는 배우 김해숙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줄이야. 자식에게 쿨하고 스스로에게 솔직하며 고난 앞에 무릎도 꿇어본 57년 인생 경험은 ‘국민 엄마’ 타이틀 뒤에 숨겨지기엔 너무 아까운 자양분이었다.
지난 29일 방송된 SBS 예능프로그램 ‘힐링캠프’에서는 김해숙 편이 전파를 탔다. 그는 이날 우연히 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된 출발점을 비롯해 결혼 이후 더욱 불타오른 연기에 대한 욕심, 그리고 잠시 사업에 눈을 돌렸던 공백기와 그로 인한 좌절, 이후 찾아온 절박한 심정으로 맞닥뜨린 연기에 대한 소중함을 고백하며 중년 여배우가 쌓아올린 아름다운 성취를 뽐냈다.
이날 방송에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소극적이거나 희생과는 전혀 거리가 먼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김해숙식 스타일'이었다. 스스로에 대해 “성격이 욱하고 급한 데가 있다”고 표현한 김해숙은 무도회장을 좋아해 결혼 이후까지 출입한 사실을 밝히며 원하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적극적이고 저돌적인 성품을 드러냈다.

이 같은 면모는 연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주인공 친구 역할을 맡았다가 캐릭터 연기가 가능한 배역을 보고 감독을 찾아가 당당하게 이를 요구한 일화부터, 임신 사실을 숨기면서까지 하고 싶은 배역을 손에 쥐고 놓지 않았던 악착같은 경험담은 김해숙의 성품을 더욱 확실히 알게 하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성품은 김해숙에게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뼈아픈 좌절의 기억까지 안기는 요인이기도 했다. 청년 시절 주인공을 도맡다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밀려난 주역 배제는 그를 사업에 눈 돌리도록 했고, 이는 그가 당시를 “빚 울타리에서 허비했던 시기”로 정의 내리게 만들며 깊은 상처를 남겼다.
당시 지방 행사장을 전전하며 노래하는 자신의 모습에 비참함을 느껴 현재까지도 음악을 즐기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이 같은 치욕의 경험은 아이러니하게도 김해숙을 최고의 배우로 우뚝 서게 만든 영양분 많은 토질이었다. 생존을 위해 다시 본업으로 돌아온 그는 절박함으로 연기하기 시작했고, 이는 고스란히 시청자와 관객의 가슴에 전달돼 그가 주로 연기했던 어머니 역할을 통해 김해숙을 대한민국 대표 어머니상으로 자리하게 만들었다. KBS 2TV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질박한 여인네로 분하기 위해 일부러 라면을 먹고 자 얼굴을 퉁퉁 붓게 만든 일화는 "사업실패 경험이 없으면 배우 김해숙도 없었을 것"이라는 그의 말을 방증하는 좋은 예다.
그리고 이 같은 그의 인생사를 통해 더욱 확고해지는 건 이 여배우가 앞으로 펼칠 더 다양한 연기 세계에 대한 기대감이다. 눈물로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상 외에도 김해숙이 이날 공개한 것처럼 홍콩에서 날아온 멋진 남자에게 가슴이 설레는 57세 여성 캐릭터를 비롯해, “50대 송혜교”라고 스스로를 칭할 정도로 자부심이 넘치는 귀여운 공주 캐릭터는 물론, 7년째 번역 업무를 찾고 있는 딸에게 돌직구를 날릴 수 있는 드센 엄마 캐릭터도 김해숙이라면 가능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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