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의 테마토크] 3대 거짓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처녀의 '시집 안 가', 장사꾼의 '밑지고 판다', 노인의 '늙으면 죽어야지'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탠다면 직장인의 '때려쳐야지'가 아닐까?
이 한 마디에 담겨진 의미는 굉장히 포괄적이다. 여건만 된다면 언제라도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표출된다. 그러면서도 냉혹한 현실 때문에 퇴사할 수 없고 그럴수록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굴욕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엿보인다. 이렇게 반어법적인 표현은 직장인들의 애환을 복합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다수의 직장인들은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뒤에서 이렇게 '에이, 때려쳐야지'라고 울분을 토해내거나 자조하며 위기상황을 이겨내려 노력한다.
IMF사태 이후 우리나라는 비정규직 계약직 직원이란 비정상적 고용구조 형태를 양산해내 현재 계약직 사원 800만 명 시대를 맞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불안한 고용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샐러리맨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에 KBS2 월화드라마 '직장의 신'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김혜수와 정유미가 보여주는 캐릭터는 직장인들에게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안겨준다.

김혜수의 미스김을 보면 황홀한 판타지에 빠졌다가도 정유미의 정주리를 보면 냉혹한 현실이 살떨리게 다가와 마음이 씁쓸해지고 미래가 암담해지는 것이다.
회사에서 직장인은 '을'일 수 밖에 없다. 회사가 '갑'이다. 하지만 미스김은 와이장 그룹에서 '수퍼갑'으로 통한다. 왜냐면 그녀는 124개의 자격증을 보유했을 정도로 못하는 게 없는 만능의 '신'같은 존재다. 기본적인 사무업무는 물론 모든 직장인들이 거부감을 갖는, 커피 타는 일을 솔선수범해서 해낼 정도로 모든 업무에 대해 적극적이고 충실하며 사명감에 넘치면서도 능력이 출중하다.
회사 밖에서도 그녀에게는 거칠 게 없다. 중장비를 조종하는가 하면 버스를 운전하고 아이까지 받아낸다. 그녀의 능력과 특기는 이력서 한, 두 장에 다 집어넣을 수 없을 정도로 무궁무진하다.
그녀는 프로다. 공과 사의 구분이 엄격하고 자신의 계약서 안에 든 업무 외의 초과 업무에 대해서는 냉철하게 수당을 요구한다. 그녀가 무서운 이유는 계약직들은 회사를 가정으로, 회사의 동료 직원들을 가족이라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지만 그녀는 철저하게 직장을 '일=돈'이라는 단순논리 안에서만 정의내리는데 있다. 그래서 그녀는 계약직 3개월로 잠깐 머무는 직장 안에서 특별한 인연을 쌓기도 싫고, 각별한 사연을 만들기도 싫다. '그냥 나는 나이므로 내 할 일만 하고 그래서 그만큼 보수만 받아가면 그 뿐일 따름'이다.
그녀는 엄연히 김점순이라는 본명이 있음에도 굳이 그 이름을 밝히려 하지 않고 다수의 여성 직장인들이 불편해 하는 미스김이라는 호칭을 스스로 고집한다. 그 이유는 그녀에게 있어서 직장은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잠시 스쳐 지나가는 정거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미스김이 딱딱한 말투 끝에 '~다만'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거의 모든 직장인들은 퇴근시간이 돼도 그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못하고 상사의 눈치를 보기 마련이고, 하기 싫은 일이 있어도 위에서 시키면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상사가 지시하면 초과근무건 휴일근무건 해야만 한다. 그러나 미스김은 다르다. 일을 시키면 '점심시간입니다만' '퇴근시간입니다만'이라고 자신의 업무의 경계에 대해 명쾌하게 고지하고 계약서에 적힌 매뉴얼대로만 근무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회식은 '몸 버리고 간 버리는 백해무익한 초과 근무'다. 그래서 그녀는 회식 참여를 당당하게 거부하는가 하면 간절한 참석 부탁에 마지 못해 자리를 함께 하지만 고기 자르는 일과 탬버린 두드리는 일에 충실하고 그 노동만큼의 수당을 받아낸다.
모든 취업 희망자들은 정규직을 원하지 불안정한 비정규직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미스김은 다르다. 그녀는 자신을 특채한 황갑득(김응수) 부장의 정규직 전환 제안을 두 번이나 거절한다. 황 부장은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미스김의 능력이 워낙 뛰어나니 붙잡아두고 싶었고, 비정규직인 그녀에게 수당을 지불하는 것보다 정규직으로 채용한 뒤 수당을 안 주고 마음대로 부려먹는 게 회사의 계산기로서는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스김에게도 첨단 계산기는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아끼고 또 아낀다. 그래서 회사에 얽매여야 하는 부자연스러운 정규직 사원보다는 자기계발과 자기투자에 유리한 비정규직이 좋다. 만약 정규직 사원이 된다면 회사를 위해 희생해야 하고 자신의 사생활이 줄어들 수 밖에 없다. 또한 정규직이 됐으므로 승진과 출세를 위해 윗사람에 아부해야 하고 초과근무로 자신의 업적을 쌓아야 한다. 당연히 수당 청구는 언감생심이다.
하지만 3개월 계약직을 고집하는 현재의 그녀의 삶은 아주 편안하고 자유스러우며 융통성이 있다. 3개월 계약기간 동안 자신이 할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펼칠 수 있고 초과근무를 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볼 일이 없다.
게다가 3개월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다닌다. '나' 자신을 위해 재충전하고 스트레스를 풀 시간을 가지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회사에서 웬만큼 잔뼈가 굵은 팀장 장규직(오지호)과 무정한(이희준)은 회사가 가정이고 동료가 가족이라고 나름대로 철학을 갖고 있지만 미스김은 그런 허황된 동화 속 얘기를 믿지 않는다. 직장은 돈버는 곳일 뿐이다.
그녀가 이렇게 차갑고 당당하고 냉정할 수 있는 배경은 아마도 현실이 매우 힘들고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미스김만큼 능력을 갖춘 비정규직 사원이 없는 게 현실이고 그런 수퍼맨이 되고 싶은 게 대다수 비정규직 직원들의 희망사항이기 때문이다. 미스김처럼 못하는 게 없는 무한의 능력만 갖췄다면 두려울 게 없다. 어느 회사건 취업이 안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피고용인이 회사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모든 고용주들은 능력있는 고용인을 채용하고 싶다. 그런 함수관계에서 미스김은 안 뽑을래야 안 뽑을 수 없는 능력자다.
장규직과 무정한은 회사 동료가 가족이라고 회사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지만 적어도 미스김에게 있어서 직장이란 살벌한 전쟁터다. 서로의 업무능력은 물론 상사와 부하 직원간의 화합과 대인관계 등의 사회성 등으로 실력을 겨눠 누가 죽고 누가 사는가를 결정지어야 하는 적자생존의 정글이 직장이다.
말이 좋아 가족이지 사실은 경쟁회사의 구성원보다 더 살벌하게 경쟁해야 하는 사람이 한 직장 내의 동료들이다.
하지만 미스김은 당연히 현실이 아니다. 드라마 속에나 존재하는 초절정 만능의 수퍼우먼으로서 픽션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일 뿐 우리와 우리 주변의 비정규직 직장인은 정주리다. 일류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대학에서 특출나게 공부를 잘 한 것도 아닌, 변변찮은 스펙의 정주리는 그래서 와이장 그룹에 계약직으로 간신히 턱걸이 입사했다.
자기주제를 알기에 그래서 항상 주눅들어 있는 그녀는 매사에 실수투성이고 야무지지 못한 성격 탓에 정규직과는 확연히 구분된 모습을 보인다.
사실 스펙이 신통치 않다고 능력마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약직이기에 미처 그 능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그저 서류철이나 할 수 밖에 없는 무능력자로 미리 선입견이 각인된다.
미스김은 당당하게 회식을 거부하지만 한 없이 나약한 정주리는 정규직 직원도 아니면서 어쩔 수 없이 회식에 참여한다. 자신의 인상을 깊게 심어주고 자신의 우호세력을 만들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1차 2차의 공식 회식 자리가 끝난 뒤에도 일부 팀원이 자기들끼리 한 잔 더 하자고 이끄는 것을 거절하지 못하고 억지로 따라간다.
거기서 그녀는 잘 먹지도 못 하는 술을 억지로 마셔야 한다. 거부하면 밉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늦게 집에 가서도 잠자리에 들 수 없다. 왜냐면 3차 술자리에서 팀원 선배가 새로운 사업 기획안을 작성해볼 것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게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라고 생각한 그녀는 취하고 졸립지만 억지로 잠과 취기를 참아가며 기획안을 작성해 팀장의 칭찬을 듣는다. 그런데 그 공로는 정규직 팀원들에게 돌아간다. 정작 기획을 내놓고 서류화시킨 사람은 정주리임에도. 왜냐면 그녀는 비정규직이니까.
툭하면 흘러나오는 정주리의 내레이션은 정주리 그녀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700만 비정규직의 가혹한 현실을 냉정하게 표현해준다.
'누구나 한때는 자기가 크리스마스트리인 줄 알 때가 있다. 하지만 곧 자신은 그 트리를 밝히던 수많은 전구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머지않아 더 중요한 진실을 알게 된다. 그 하찮은 전구에도 급이 있다는 사실을'
현실 속의 비정규직이 얼마나 간절하게 정규직을 꿈꾸는가를 정주리의 노트북에 붙어있는 포스트잇은 잘 보여준다. 거기에는 '꿈이 스펙을 이긴다' '와이장 정규직 마케터 정주리'라고 적혀있다.
'노예'가 되기 싫어서 정규직 전환 제안을 거절한 미스김이 정규직 직원이 되기 위해 회사에 거짓말을 하고 다른 회사 정규직 사원 모집 시험에 면접을 보러 간 정주리에게 '쪽팔린 줄 알라'고 말하자 그녀는 이렇게 외치며 오열한다. '그 노예 한 번 되고 싶어서 죽을 힘을 다해 버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라고.
어쩌면 미스김의 논리가 맞을 지도 모른다. 회사는 전쟁터지 놀이터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직장인들은 회사를 가정보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가정에서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회사 동료들에게 가족보다 더 많은 관심을 쏟는다.
사실 미스김의 논리대로 피고용인들은 사측에 비해 노예라는 게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주리의 말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고용불안정의 계약직 노예보다 더 많이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정규직 노예가 못돼 안달이 나있는 것도 맞다. 왜냐면 '800만명의 정주리'들이 오늘도 '정규직 노예'가 되기 위해 저마다 피땀을 흘려가며 일을 하고 아부를 하고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인, 칼럼니스트] ybacchu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