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주루는 육상 트랙종목과 마찬가지로 시계 반대방향으로 뛰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경우 주자가 진행 반대방향인 시계방향으로 뛰는 것을 가끔 허락하고 있는데 야구용어상 이를 ‘역주(逆走)’라 부르고 있다.
야구규칙은 주자의 역주가 가능한 상황을 따로 정리해놓고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플라이타구 때 다음 루로 진루하려던 주자가 포구로 인해 리터치(기점이 되는 루를 다시 밟는 행위)하기 위해 서 있던 루로 되돌아가는 경우.
둘째, 루를 밟지 않고 지나간 주자가 공과한 그 루를 밟으려 다시 되돌아가는 경우.
셋째, 자기보다 앞에 있는 주자를 앞지를 우려가 있어 되돌아 가는 경우.
크게 나누어보면 이상 3가지 정도가 현대야구의 역주 가능 상황으로 볼 수 있는데, 과거1900년대 초반에는 이외의 상황에서도 주자가 역주하는 행위를 모두 정상적인 주루플레이로 인정한 바 있었다.
그 중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는 역주에 관한 대표적인 일화는 역도루에 관한 전설(?)이 아닐까 싶다. 1908년 9월 4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저머니 셰퍼(Germany Schaefer)’라는 선수는 클리블랜드 전에서 역방향으로 뛰는 일명 ‘역도루’ 플레이를 선보였다고 한다. 전해져 오는 그의 플레이는 이러했다.
주자 1, 3루 상황에서 1루주자로 나가 있던 저머니 셰퍼는 3루주자와 더블스틸 사인을 주고 받은 뒤, 투수가 초구를 던지는 순간 냅다 2루로 뛰어 살았지만 포수가 자신에게 송구를 하지 않아 3루주자가 3루에 그대로 머무르게 되자 투수의 2구째에 다시 1루로 역주해 복귀하는 역도루 장면을 연출했다.
이어 3구째를 던지는 순간 저머니 셰퍼는 또다시 2루로 도루를 시도했고, 이번에는 클리블랜드의 포수 닉 클라크가 2루로 재빨리 송구했지만 악송구가 되는 바람에 3루주자가 유유히 득점에 성공하며 디트로이트는 경기를 승리로 장식할 수 있었다.
역도루 금지 규정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관계로 당시 이 경기의 공식기록원은 어쩔 수 없이 저머니 셰퍼에게 도루 3개를 모두 인정했는데….
한편 1900년대 초반 메이저리그의 전설적 선수 타이 콥은 2루 진루 후, 상대가 심기를 건드리자 1루쪽으로 거칠게 역도루를 감행해 1루수의 부상을 야기시키기도 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단초가 되어 이후 역주 또는 역도루를 인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규칙개정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또 한가지 중요한 규칙적 변화의 흐름은 야구경기를 경기답게 만드는 쪽으로 규칙이나 규정이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트라이크 아웃 낫아웃 상황에서 타자주자가 주루를 포기하고 타석 주위를 벗어나면 바로 아웃을 선언(과거에는 덕아웃까지 들어간 뒤라야 아웃)하고, 낫아웃 상황의 타자주자가 고의는 아니지만 방망이나 발로 포수가 아직 잡지 못한 공을 건드려 수비를 곤란하게 만들었을 때, 이를 수비방해로 간주해 아웃을 선고하는 등의 규칙도 경기가 비정상적인 상황으로 인해 엉망이 되는 것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주자가 정규로 루를 점유하고 투수가 다음 타자를 상대하기 위해 투구자세에 들어가면 이전에 있었던 루로 다시는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 놓은 주자의 역주금지 규칙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마련된 일종의 경기 안전장치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역주금지 규정을 깨고 2루주자 신분에서 1루주자로 공간을 거슬러 되돌아간 ‘진 세구라(밀워키)’의 희대의 역주사건(1편 참조)은 기록적으로 어떻게 처리될까?
일단 ‘진 세구라’가 처음 1루에서 2루로 도루를 한 것은 정상적이기에 그대로 도루(S)가 된다. 그러나 갈 수 없는 1루로 되돌아간 주루에 대한 기록은 더블스틸을 시도하다 태그아웃된 1루주자의 도루자(C.S) 상황을 이용한 진루, 즉 야수선택 성격의 도루실패(1-5T:투수의 송구를 받은 3루수가 1루주자를 태그하는 사이)로 진루(?)한 것으로 기록된다.
그리고 1루로 되돌아간 ‘진 세구라’가 같은 이닝에서 재차 2루로 도루를 시도하다 태그아웃된 것은 도루자(C.S). 종합하자면 결과적으로 ‘진 세구라’는 한 이닝 같은 루간(1-2루)에서 무려 3번의 도루와 관련되어 일어날 수 있는 진루기록을 차례로 보여준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직접 펜을 이용해 기록지에 적어 넣는 일은 빈 공간을 이용해 어찌어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컴퓨터를 이용한 현재의 한국프로야구 기록 전산입력 시스템으로는 그날 ‘진 세구라’의 역주와 재 도루시도에 관한 부분은 도저히 소화해낼 수 없는 장면이었다.
아무튼 2013 메이저리그에서 나온 희대의 역주 인정 사건은 기록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있는 야구팬들에겐 마치 숨어있던 공룡의 화석발자국을 만난듯한 기분, 그 자체였을 것이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