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의 테마토크] 수애의 바통을 신세경이 이어받았다. 지난달 2일 종영된 SBS 월화드라마 '야왕'에서 여주인공 주다해 역을 맡은 수애는 이 드라마가 방송되는 동안 시청자들에게 실컷 욕을 먹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주다해는 자신을 위해 헌신하고 사체유기의 범죄까지 저지른 하류(권상우)와 딸까지 낳았음에도 출세를 위해 그에게 등을 돌리고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신분상승의 기어를 변속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방송되는 MBC 수목드라마 '남자가 사랑할 때'의 신세경이 요즘 시청자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다. 신세경이 맡은 서미도는 한태상(송승헌)과 이재희(연우진)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하며 두 남자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 남자들은 당연히 분노하고 여자들도 그리 동감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이 드라마는 복잡하고 어이 없는 출생의 비밀이나 근친상간 같은 막장의 코드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정멜로라는 제작진의 캐치프레이즈가 무색하리만치 주인공의 캐릭터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럭비공같은 방향성을 지녔으며 상황설정은 도저히 납득하기 힘들 만큼 얽히고설켰다. 그래서 보면 볼수록 화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빠져든다. 때론 경쟁작 KBS2 '천명'에 뒤지기도 하지만 간신히 수목극 시청률 1위를 수성하는 이유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서미도와 그녀를 동시에 사랑하는 한태상과 이재희다. 그런데 이들은 단순한 삼각관계를 형성해도 되는 관계가 아니다. 경제적 후원의 관계가 형성돼 있고 그래서 보은이냐, 배신이냐의 양극의 결단이 요구되는 상황인데 전자가 아닌 후자로 흘러가기에 시청자들의 화를 북돋우는 것이다.
서미도는 달동네 후미진 곳에서 허름한 책방을 운영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무능력한 서경욱(강신일)의 맏딸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공연기획자의 꿈을 키웠지만 초라한 현실 때문에 꿈을 접어야 함은 물론 대학을 다닐 수 있을지도 모르는 암담한 벽에 부닥쳐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는 강렬한 욕망과 당당한 자존심을 지녔다. 구청에서 나눠주는 극빈자 구제용 쌀을 타오라는 부모의 심부름을 하다가 언론이 카메라를 들이대자 창피해서 쌀배급을 포기하고 그 자리를 피할 정도로 현재의 가난이 싫고 그래서 자존심이 상한다.
한태상은 어릴 적 어머니가 바람이 난 데다 사채빚을 끌어 쓰고 그것을 가족에게 떠넘기고 가출한 뒤 아버지가 그 충격으로 세상을 떠난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하지만 그는 공부도 잘 했고 자존심도 강한 소년이었다. 사채빚을 받으러 온 깡패들에게 대담하게 대들고, 그런 당찬 모습에 반한 보스 김사장(이성민)이 그를 스카우트한다.
그렇게 한태상은 폭력조직에서 2인자로 성장하고 서경욱에게 빚을 받으러 와서 행패를 부리다가 서미도를 보고는 첫눈에 반해버린다. 한태상은 서미도에게서 10여년 전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당돌하게 자신의 처녀성과 빚을 바꾸자는 서미도에게 푹 빠져 그녀를 고이 지켜주고는 빚을 탕감해주고 향후 7년간 대학 학비를 대주며 묵묵하게 키다리 아저씨 역할을 한다.
김사장은 한태상이 자신의 돈을 빼돌렸다고 오해해 그를 잡아들이고자 서미도를 납치한다. 한태상이 서미도를 구해주는 과정에서 김사장의 칼을 맞고 뒤늦게 나타난 한태상의 오른팔 이창희(김성오)가 한태상을 구하려다 보스를 죽인다.
한태상은 이창희가 감옥에 가있는 동안 성공해 골든트리라는 큰 회사를 차리고 이창희의 동생 이재희의 뒷바라지를 해 그를 MBA에까지 유학시킨다.
이재희와 서미도는 구청에서 쌀을 나눠줄 때 잠깐 스쳐지나간 적이 있다. 당시 서미도에게 반한 이재희는 잊지 못하고 있다가 7년 뒤 괌에서 우연히 그녀와 재회한다. 서미도는 골든트리에 입사한 뒤 출장차 왔고 이재희는 골든트리에 입사하기 직전 머리를 식히러 온 것.
하지만 이미 한태상과 서미도는 부모에게 허락을 받고 교제하고 있는 사이다. 지금까지 여자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한태상에게 서미도는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여자다. 연애를 할 줄 모르는 그는 인터넷을 뒤지고 전문서적을 탐독하며 서미도와 소통할 방법을 찾는 순진한 모습을 보여준다. 적어도 서미도 앞에서 그는 예전의 거친 깡패도, 성공한 사업가도 아닌, 사랑에 쑥맥인 순진한 중년의 남성일 뿐이다.
서미도는 12살 많은 한태상이 부담스럽고 깡패 출신인 점이 무섭다. 하지만 그가 싫지만은 않다. 깡채 출신이지만 나름대로 책도 많이 읽었고 순수한 면도 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꿈을 이뤄줄 부를 갖고 있다. 서미도는 명품백을 들고 고급승용차를 타며 으리으리한 집에서 살고 싶은 세속적 욕망을 가진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서히 한태상에게 마음의 문을 열며 그를 받아들일 듯하다.
그런 그녀지만 이재희의 끊임 없는 구애공세를 완벽하게 거부하지 않는다. 그녀의 마음이 한태상을 버리고 이재희에게 돌아선 결정적인 계기는 자신의 꿈이었던 공연기획자로 나아갈 기회가 없어진 게 한태상 때문이었다는 오해다. 그런 오해의 결과로 화가 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한태상의 근본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그녀가 갑자기 마음이 돌아선 것은 시청자를 납득시키기 어렵다.
서미도의 캐릭터가 중심이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시청자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면 이재희는 확실하게 배은망덕한 남자다.
비록 형 이창희가 한태상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 갔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창희의 선택이었고 이창희는 그 누구보다 한태상을 믿고 따른다. 한태상을 위해서라면 이창희는 폭탄을 들고 불속에라도 뛰어들 사람이다. 게다가 한태상은 이창희와의 의리를 끝까지 지키고 있으며 그래서 이창희를 대신해 열과 성을 다해 이재희의 뒷바라지를 해줬다.
이재희에게 있어서 한태상은 큰 형같고 아버지같은 인물이다. 은인이다. 그럼에도 이재희는 서미도가 한태상의 여자인 것을 알면서도 금단의 열매를 따먹는다. 사나이들의 세계에서 이것은 아주 심각한 배신이고 한태상이나 이창희의 시각에서 볼 때는 몰염치한 패륜이다.
이 드라마가 치정멜로를 표방하는 이유는 충분히 존재한다. 남녀간의 사랑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온갖 그릇된 행동과 비뚤어진 의식으로 등장인물들의 사랑을 복잡하게 그려냄으로써 시청자들의 도덕적 시각을 흔들어 화를 유발함으로써 시청률을 올리겠다는 의도다.
그런 작가 혹은 제작진의 의도는 충분히 맞아떨어지고 있다. 시청률이 떨어질만 하면 더욱 잔인해지는 서미도와 후안무치해지는 이재희의 애정행각, 그리고 그로 인해 분출하는 한태상의 분노를 삽입해 시청률을 회복하고 있다.
시청자들은 한태상이 서미도에게서 벗어나는 것과 더불어 더 나아가 서미도에게 복수하기를 원하고 있다. 일차적으로 한태상이 시키지 않았음에도 이창희가 자발적으로 서미도를 승용차로 치어 중태에 빠뜨렸다. 하지만 이 정도로 복수가 끝난 것도, 시청자가 만족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면 한태상이 서미도를 향해 아낌 없이 불태운 사랑의 순수함이나, 그녀와 그녀의 가족에게 베푼 호의와 정성은 결코 배신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친형제 이상으로 보살펴준 이재희에 대한 성의도 간과할 수 없다. 세상에 반이 남자인 만큼 나머지 절반은 여자다. 그럼에도 이재희는 하필이면 은인의 여자를 빼앗으려 하고 있다. 어차피 이성간의 사랑이란 감정은 영원하지 못하다. 사랑의 감정이 어느날 갑자기 격정적으로 찾아오는 만큼 그 감정은 어느새 연기가 스르르 사라지듯 소멸되기 마련이다. 그런 감정의 출렁임에 의리도 인연도 은혜도 모두 저버리겠다는 이재희의 의식상태는 유치하고 단세포적이며 배은망덕하다.
이 드라마에 막장코드가 없으면서도 희한하게 막장드라마를 보듯 화가 나고 분노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깡패였던 한태상은 한 없이 순수하고 착한 인물로 그려지고 반듯하고 정직한 청년인 줄 알았던 이재희는 사랑 앞에서는 한 없이 야비하고 이기적이다.
그 가운데 선 서미도는 야무지고 자기 앞가림이 뛰어난 여자인 줄 알았더니 남자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하는 악녀였다.
드라마는 픽션이지만 실제 생활의 현실을 반영한다. 만약 당신이 한태상이나 이재희라면 서미도에게 집착할 것인가? 만약 당신이 서미도라면 한태상과 이재희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아마 다수의 남자는 서미도를 포기할 것이고 다수의 여자들은 한태상 이재희 두 남자 모두에게서 떠날 것이다. 왜냐면 사랑은 진행형일 때는 세상에서 가장 절실한 감정이지만 막상 정점을 찍고 나면 소나기 온 뒤의 '언제 그랬냐' 식의 맑은 날씨로 변함으로써 판단능력을 제 자리로 되돌리기 때문이다.
사랑을 해본 유경험자라면 한태상 서미도 이재희같은 위험한 사랑놀이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시청자는 화를 내면서도 이 비현실적인 사랑싸움에 몰두하게 된다.
[언론인, 칼럼니스트] ybacchu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