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상에 나가있는 주자가 득점을 올리는 방법 중에서 가장 확률적으로 떨어지는 것을 꼽으라면 그것은 단연 홈스틸이다. 주자의 최종 기착지이자 목적지라고 할 수 있는 홈 플레이트 바로 앞을 포수가 버젓이 지키고 있고, 곁눈질로 주자의 움직임을 늘 감시하고 있는 투수와 포수의 거리는 그 어느 루간보다도 짧다.
그런데 이러한 물리적인 요인보다도 더욱 주자의 홈스틸 성공확률을 떨어뜨리게 만드는 것은 홈스틸 시도 자체가 온전한 기록으로 살아남기 어려운 규칙의 제약 때문이다.
도루관련 야구규칙 10.08 (a)항, [주] 안에는 홈스틸 기록에 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부가적으로 붙어 있다.

‘홈스틸의 경우 3루주자가 투구 전에 스타트했다 하더라도 와일드피치 또는 패스트볼의 도움 없이 주자가 득점할 수 있었다고 기록원이 판단했을 경우에 한하여 그 주자에게 도루를 기록한다.’
이 규칙문구를 대충 읽어봐도 주자가 기록적으로 홈스틸을 인정받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5월 23일 대구 삼성전 6회초 2사 주자 1, 3루 상황에서 3루주자로 나가 있다가 투수 윤성환(삼성)의 투구를 받은 포수 이지영이 투수에게 공을 돌려주는 사이 홈을 훔친 LG 권용관의 기습 득점은 홈스틸 기록인정을 놓고 보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기에 충분한 플레이였다고 할 수 있겠다.
삼성 배터리의 허를 찔러 득점에 성공한 권용관이 유유히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권용관의 득점을 홈스틸로 여기는 분위기가 짙었는데, 정작 공식기록이 야수선택에 의한 득점으로 발표되자 일부에서는 그러한 규칙적용의 배경이 무엇인지를 놓고 무척의아스러운 반응이었는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권용관의 기습득점은 10.08 (g)항이 적용된 경우다. (g)항에는 주자가 수비측의 무관심을 틈타 진루하였을 경우, 도루를 기록하지 않고 야수선택으로 기록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투구가 포수에게 도착하기까지 전혀 득점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던 3루주자 권용관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은 채, 공을 천천히 던져준 포수 이지영의 태만한(?) 행위가 있었기에 3루주자 권용관의 득점이 가능할 수 있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혹자는 주자의 딜레이드 스틸(주자가 일부러 스타트를 늦게 끊어 수비측의 방심을 틈타 진루하려는 시도)로 해석하기도 했는데, 딜레이드 스틸 시도 때 주자가 다음 루로 스타트를 끊는 시점은 일반적으로 포수가 투구를 안이하게 잡고 난 다음이다. 권용관의 경우처럼 포수의 손에서 투수에게로 공이 넘어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스타트를 하지는 않는다.
또 한가지는 설령 딜레이드 스틸로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권용관의 경우는 홈을 노린 것이었기에 홈스틸 기록을 얻기가 더욱 어려운 정황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홈스틸은 타이밍상 확신이 없다면 인정받기 어렵다. 투구에 앞서 뛰었더라도 와일드피치나 패스트볼이 나왔을 때는 투구가 포수에게 제대로 갔다면 아웃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면 도루가 아닌 와일드피치나 패스트볼로 기록된다.
하물며 투구에 앞서 뛴 것도 아닌, 투구를 받은 포수의 반환성 송구 이후에 뛴 것은 타이밍상 더더욱 투구에 앞서 뛴 것으로 보기 어렵다. 도루관련 조항 여기저기에 기술되어 있는 ‘투구에 앞서 스타트’ 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면, 투수의 투구나 견제구가 아닌 일반 야수의 송구를 이용한 루 훔치기는 정식 도루기록으로 인정하기에 무리가 있다는 해석이다.
좀더 가지를 이어 주자가 포수의 투구 낙구를 보고 스타트했다가 다음 루에서 아웃되었을 경우, 기록상 도루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역으로 살았다 해도 도루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투구 후 포수의 넥스트 플레이를 보고 주자가 플레이를 시도했기 때문에 그렇다. 권용관의 경우도 투구에 앞서 뛴 것이 아니라 포수의 넥스트 플레이를 보고 움직인 것이었기에 같은 맥락의 분석이 가능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변명(?)같은 이유보다 더 큰 이유가 하나 있다. 그것은 페어플레이 분위기 조성이다. 주심은 투수와 타자가 동시에 준비가 되었을 때 플레이볼을 선언한다. 어느 한쪽이라도 미처 준비가 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대결을 붙이지 않는다.
도루도 마찬가지다. 주자가 정상적으로 루를 훔치려는 행위는 투수가 투구자세에 들어간 다음이라야 한다. 그것이 도루기록의 페어플레이 정신이다. 도루규칙 구석구석에 반복해서 나와있는 ‘투수의 투구에 앞서 스타트’ 또는 ‘투수의 투구나 견제구를 이용’ 이라는 문구를 아무 의미없는 문장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한 것이다.
일반적인 야수의 송구를 이용한 진루까지 도루로 인정하려 했다면 ‘송구를 이용’ 이라는 문장이 들어있어야 한다. 아울러 도루를 인정하지 않는주자의 여러 진루(풋아웃-포스아웃-실책-안타-야수선택-보크-폭투-패스트볼) 예시 중, ‘야수선택’ 부분은 제외되어야 맞다.
참고로 점수차가 크게 벌어진 상황에서 도루시도를 했지만 무관심 진루로 해석해 도루를 인정하지 않는 장면 역시, 현재는 10.08 (g)항의 무관심 야수선택에 의한 진루 조항을 끌어들여 적용하고 있는데, 사실 이 조항은 크게 앞서 있는 팀의 도루시도와 같이 경기매너에 관한 불문율 위반 논란으로 그라운드가 아수라장이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마련된 조항은 아니다. 무관심 진루에 관한 법 적용의 근거를 찾다 보니 아전인수격으로 가져온 규칙이다. 오히려 권용관과 같은 유형의 주루상황에 대비해 만들어진 규칙으로 보는 것이 좀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지난해(2012년) 4월 28일 광주 KIA-SK전에서는 무관심에 의한 주자 진루가 어떤 상황을 말하는 것임을 보여준 또 하나의 적절한 장면이 있었다. 3회 초 무사 주자 1루 상황에서 1루주자 정근우(SK)가 볼카운트2-2 때, 투수 윤석민(KIA)이 포수에게 공을 넘겨받고 투수판을 밟기 전, 마운드 부근에서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 비어있는 2루를 향해 은근 슬쩍 스타트를 끊었다가 이를 눈치 챈 투수의 2루송구로 태그아웃된 장면이었다.
당시 기록원은 정근우의 아웃을 고민 끝에 도루시도로 해석, 도루자로 기록했는데, 기록위원회는 이러한 경우 향후 주자가 2루에서 살았다 해도 도루가 아닌 무관심 야수선택에 의한 진루(10.08-g항)로 기록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이번 권용관의 홈스틸 불인정은 그러한 결정의 연장선상에 자리한 규칙해석이자 결과인 것이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
권용관이 기습적으로 홈을 파고 드는 장면. /대구=최규한 기자 dreamer@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