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은 선수를 믿어선 안 된다".
유럽 축구계의 격언 중 하나다. 어차피 경기는 선수가 하는 것인데 감독이 선수를 안 믿으면 어떡하냐는 관점에서는 뚱딴지 같은 소리로 들릴 수 있으나 의미 심장한 말이다.
당연히 믿음 직한 선수들을 갖고 팀을 구성해 훈련한 뒤 실전에는 옥석을 가려 진짜 믿음이 가는 선수들로 선발 라인업과 교체 멤버를 짜야 함을 부정하는 말은 물론 아니다.

지도자는 자신이 추구하는 스타일에 맞는 선수, 현재 컨디션이 좋은 선수, 최근 부상 경력이 없는 선수를 기용해야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어지간한 부상은 숨기고 싶어 하는 게 대부분 선수들의 심리이기 때문에 감독은 선수가 괜찮다고 하는 말만 믿고 경기에 투입해서는 최선의 팀 경기력을 끌어낼 수 없다는 점에서 경계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감독이나 코치가 물어보면 선수들은 경기에 뛰고 싶어 누구나 "컨디션이 좋다" 고 말하기 때문이다.
'토털 사커의 창시자'로 일세를 풍미했던 네덜란드의 리누스 미셸 감독도 이런 원칙에 철저했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1928년생으로 2005년 77세에 타계한 미셸 감독의 토털 사커는 네덜란드가 1974년 서독 월드컵과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준우승, 1988년 유럽선수권 우승을 이룩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미셸 감독은 네덜란드의 아약스 암스테르담 감독 시절인 1960년대 말부터 불세출의 스타 요한 크루이프(66)를 중심으로 전원 공격-전원 수비의 토털 사커를 추구, 현대 축구를 한 단계 끌어올린 공로를 인정 받아 국제축구연맹(FIFA) 선정 20세기 최고 감독에 뽑히는 영예를 누렸다.
그런 미셸 감독이 좋아했던 한국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차범근(60) 전 수원 삼성 감독이다. 차범근의 독일 분데스리가 마지막 시즌이던 1988~1989시즌 바이어 레버쿠젠의 사령탑이던 미셸 감독은 차범근을 높이 평가했다. 빠른 스피드와 강인한 체력에 군더더기 없는 볼처리가 특징인 차범근이야말로 미셸 감독이 추구하는 토털 사커에 아주 적합한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차범근 또한 자신을 가르친 지도자 중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미셸 감독을 꼽을 만큼 궁합이 맞은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 1989년 여름 축구 선수로서는 황혼기인 36세였지만 체력적으로는 더 뛸 수도 있었던 차범근이 은퇴를 선택, 지도자와 선수로서 만남은 1년에 그쳤지만 그 뒤에도 두 사람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8회 연속 및 통산 9번째 월드컵 본선 진출을 노리는 한국 축구 대표팀이 2014 브라질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마지막 3경기를 앞두고 지난 27일 소집돼 28일 레바논과 원정 경기(6월 5일 오전 2시반)를 치르기 위해 장도에 오른다.
이번에 소집된 대표팀 명단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바로 최강희 감독이 '선수를 믿지 않는'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최 감독은 경고 누적으로 레바논전에 뛸 수 없는 데다 허벅지 부상으로 시즌 막판 소속 팀 경기에 결장한 '중원 사령관' 기성용(스완지시티), 옆구리 부상서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미드필더 구자철(아우크스부르크), 소속 팀 주전 다툼서 밀려 출장 기회를 거의 얻지 못하며 시즌을 보낸 대표팀 간판 골잡이 박주영(셀타 비고)를 선발하지 않았다.
반면 지난해 런던 올림픽 일본과 3~4위전서 승리한 뒤 '독도 세리머리'를 펼쳐 FIFA로부터 A매치 2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아 레바논전까지 출전할 수 없는 미드필더 박종우(부산)는 최 감독의 낙점을 받았다. 박종우가 현재 K리그서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는 데다 이번에 구성된 대표팀이 그대로 우즈베키스탄전(6월 11일 오후 8시 서울)과 이란전(6월 18일 오후 9시 울산)에도 나설 계획이기 때문이다.

즉 최 감독은 본선 진출에 가장 중요한 고비인 마지막 3경기를 기성용 구자철 박주영 없이 치르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고 이를 두고 일부 전문가들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기성용의 경우 레바논전에는 어차피 뛸 수 없지만 큰 부상이 아닌 데다 우즈베키스탄전과 이란전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있으므로 레바논 원정을 다녀온 뒤 마지막 두 경기 엔트리를 재구성해도 된다는 주장이다.
박주영을 선발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별 이견이 없으나 구자철에 대해서는 기성용의 경우와 비슷한 견해가 나오고 있다. 시즌 막판 복귀해 실전에 나섰으므로 일단 선발해서 상태를 지켜볼 수도 있지 않냐는 의견이다.
하지만 최 감독은 평소 강조해 온 선수 선발 원칙을 지키는 한편 훈련 과정에서 효율성을 중시해 6월에 있을 실전에서 최고의 경기력을 발휘한 가능성이 없다고 본 이들 셋을 배제하고 컨디션 좋고 부상이 없는 선수들로 3연전을 모두 치르겠다는 결심으로 이번 대표팀을 소집했다.
현재 한국은 본선 직행 티켓이 2장 걸려 있는 최종예선 A조에서 한 경기를 더 치른 우즈베키스탄(승점 11, 3승 2무 1패)에 이어 승점 10(3승 1무 1패)으로 2위를 달리고 있고 이란(승점 7, 2승 1무 2패) 카타르(승점 7, 2승 1무 3패) 레바논(승점 4, 1승 1무 4패)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즉 레바논전을 통해 한국의 본선 자력 진출이 확정되지는 않는다.
최종예선을 마친 뒤 본선 진출 여부와 관계 없이 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나 원 소속 팀인 전북 현대로 복귀하겠다는 의사가 확고한 최 감독이 일부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마지막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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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희 감독(위) / 구자철-박주영-기성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