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평의 야구장 사람들] 과격한 세리머니와 박찬호의 양복 찢기 추억
OSEN 천일평 기자
발행 2013.05.29 08: 48

지난 1996년 6월 19일 LA 다저스의 루키투수 박찬호의 ‘선수 탈의실 난동사건’이 다저스 구단은 물론 한인 야구팬들 사이에 화제로 떠오른 적이 있습니다. 시카고 컵스와의 원정경기가 끝난 직후 다저스의 선수 탈의실에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그날 경기에서 박찬호는 연장 10회부터 3이닝 동안 무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하고 13회초에 결승 타점을 올려 다저스가 4-3 으로 승리하는데 수훈선수였습니다. 박찬호는 탈의실에서 기자들의 인터뷰에 응하다가 갈아입으려 걸어놓았던 자신의 양복이 엉망이 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가위로 찢겨 바지가 반바지로 변했으며 상의는 소매가 없어져버렸고 대신 양복 옆에는 디스코 의상이 걸려있었습니다.
박찬호는 발끈한 나머지 의자를 집어던지고 욕설을 퍼부어 장난을 치려던 동료선수들이 썰렁한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이 양복은 박찬호가 1994년 다저스와 입단 계약을 맺은 뒤 처음으로 자비로 구입했던 ‘뜻 깊은 양복’이어서 더 화 나게 만들었습니다.

박찬호는 자신이 첫 승리를 거뒀던 시카고를 방문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모처럼 입고 나섰다가 봉변을 당한 것입니다.
멋진 승리를 거둔 루키들을 고참선수들이 놀리는 ‘다저스의 전통’으로 포수 마이크 피아자와 토미 라소다 감독도 박찬호에게 디스코 의상을 입어야한다고 설명했으나 박찬호는 이를 거부하고 유니폼 바지에 점퍼 차림으로 클럽하우스를 빠져 나갔습니다.
상당수의 고참선수들은 박찬호를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1993년 신인상을 차지한 피아자 는 “지난해 노모 히데오도 겪었고 나도 당했으며,1992년엔 에릭 캐로스도 당했던 일”이라며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다”면서 “박찬호로 인해 전통이 깨어졌다”며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그러나 박찬호는 “루키에게 장난을 치는 다저스의 전통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옷을 감춘 예는 있어도 아예 찢어버린 적은 없었다”고 반발했습니다.
피터 오말리 구단주는 다음 날 박찬호의 에이전트 스티브 김 씨에게 전화를 걸어 “선수들의 장난은 하나의 전통이 된지 오래이니 찬호를 이해시켜주기 바란다”고 당부한 뒤 “그러나 장난이 더 이상 재미있지 않을 때 뒷 수습을 제대로 못한 고참선수들에게 큰 책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LA 타임스의 보도를 접한 한인야구팬들 대부분은 “미국 풍습을 이해못한 박찬호가 잘못했다”는 내용이었지만 미국 언론들은 박찬호를 이해하는 쪽으로 누그러졌습니다. ‘고참선수들이 박찬호의 옷을 가위로 잘라버릴 이유는 없었다’는 것이 미국 언론의 중론이었습니다.
지난 26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SK-LG 경기종료 후 MVP로 뽑힌 LG 정의윤이 인터뷰를 하던 중 LG 임찬규에게 물벼락을 맞았습니다. 옆에서 인터뷰를 하던 정인영 KBS N 스포츠 아나운서도 애꿏게 물벼락을 흠뻑 맞은 사건이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와 방송사 간의 감정 싸움으로 번지는 등 연일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사건발생 후 KBS N 스포츠 김성태 PD는 자신의 트위터에 "야구선수들 인성교육이 진짜 필요하다. 축하는 당신들끼리 하던지, 너네 야구 하는데 누가 방해하면 기분 좋으냐"며 다소 감정이 섞인 발언을 했습니다.
이어 이효종 KBS N 편성팀장은 "도대체 기본적인 소양교육은 누구의 몫인가. 창조할 능력이 없으니 남의 것을 따라했겠지만, (중략) KBS N에서 더 이상 경기 후 LG선수 인터뷰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LG의 주장 이병규는 27일 "선수단을 대표해 정인영 아나운서께 사과드린다"고 밝혔고 당사자 임찬규 역시 "내가 잘못했다. 정식으로 직접 사과드리겠다"고 반성했습니다.
선수협회는 27일 보도자료를 통해 사과의 뜻을 전하며 "야구 관계자나 언론사 등 책임 있는 지위에 계시는 분들이 인성교육과 실력 운운하면서 무책임하게 프로야구선수 전체를 매도하고 한 선수를 비난하기 위해 대중들을 선동하는 것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다" 라고 유감을 표시하면서 방송사 관계자들을 비판했습니다.
사건을 접한 네티즌들은 "임찬규의 행동이 과했다" "KBO(한국야구위원회)는 선수들의 소양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방송사 관계자들도 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다양한 의견을 내놓고 있는 형편입니다.
정 아나운서의 팬들은 ▶임찬규가 정 아나운서만 조준한 점, ▶감전 사고의 위험을 간과한 점, ▶지난 해에 이어 같은 행동을 반복한 점, ▶선수와 리포터 사이의 문화가 미국과 다르다는 점 등을 들어 임찬규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5년 전에도 과격한 세리머니가 사회적 이유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필자의 2008년 6월 30일자 칼럼을 발췌해 소개하겠습다.
‘약간은 희한한 일(?)이 지난 6월 29일 인천 문학구장 한화-SK전이 끝나며 벌어졌습니다. 이날 경기가 올 시즌 최장 이닝인 15회 연장전이 펼쳐졌다는 사실보다는 끝내기 적시타를 날린 김재현에게 동료 선수들이 덕아웃에서 달려나와 물 세례만 퍼부었다는 게 극적인 결승타로 마무리된 다른 경기의 구타 세리머니 장면과 다르다는 점입니다.
같은 날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기아-롯데전에서는 9회말 역전의 발판이 된 2루타를 때리고 결승점을 뽑은 정보명에게 동료 선수들이 달려나와 물 세례 뿐아니라 머리, 등어리를 주먹으로 때리고 넘어뜨린 다음 발로 밟고 차는 모습이 TV로 생생하게 중계됐습니다.
열흘 전 소설가 김종광 씨는 한국일보 칼럼 ‘때리지 맙시다’에서 끝내기 안타를 때리고 홈에 들어오는 선수를 축하하는 동료 선수들의 폭력 세리머니가 보기 민망하다는 내용을 적은 적이 있습니다.
김성근 SK 감독은 “극적으로 이겼지만 얼마전부터 선수들에게 오버 액션은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밝혀 김재현이 구타 세리머니를 심하게 당하지 않은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서정환 전 기아 감독도 ‘축하 세리머니도 개발해야’ 한다고 공감을 표시했습니다.
그리고 15일 인천 기아전에서 대타홈런을 날린 SK 박재홍은 덕아웃에 들어온 뒤 하이파이브를 하는 동안 후배들에게 뒤통수를 심하게 맞아 보기에 좋지 않았다고 아쉬움을 표시했습니다. 뒤통수 때리기, 발로 차기, 뒤에서 목 휘어 감기, 잡아서 넘어뜨리기, 넘어진 사람 발로 차고 밟기 등은 이종격투기에 나오는 싸움기술이 아니라 요즘 야구장에서 홈런이나 결승타를 때린 경기 히어로에 대한 세리머니 장면이라는 것입니다.
한화 선수들은 지난 25일 기아와 청주전에서 김태균이 연장 12회말 1사 1루에서 끝내기 2루타를 때려 5-4로 극적인 승리를 차지하자 김태균의 머리에 물을 끼얹고 뒤통수 등 온몸에 뭇매를 가한 다음 넘어뜨리고 발로 밟는 장면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장면 후 김인식 한화 감독은 “근래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좀 지나친 것 같다”고 말하고 “너무 심한 행위는 하지 말라고 선수들에게 당부할 작정”이라며 폭력 세리머니 자제에 나서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순철 우리 히어로즈 수석코치도 “우리 구단에서는 내가 나서서 선수들에게 덕아웃 밖으로 나가지 말고 끝내기 적시타가 나와도 심하게 때리거나 넘어뜨리는 행위는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 있다”며 적극적으로 좋지 않은 관행을 금지할 뜻을 비췄습니다.
이순철 코치는 자신이 선수로 뛰던 1998년 이전에는 결정적인 홈런이나 끝내기 안타를 때리더라도 동료 선수들이 뛰어나와 등을 두드리거나 손벽을 마주치는 정도에 그쳤는데 2000년 이후 과격한 축하 세리머니가 나왔다고 설명합니다.
소설가 김종광 씨는 ‘생일빵이라고 해서 생일 맞은 아이를 한없이 패대는 일부 청소년들한테 배운 것일까?’라며 어디서 축하 세리머니가 과격하게 유래했는 지 궁금하게 여깁니다. 무엇보다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꿈을 키워주고 국민들에게 밝고 건강한 여가선용을 약속드린다’는 모토를 정하고 출범한 프로야구에서 최고로 잘한 선수가, 최고의 하이라이트 순간 두들겨 맞고 발로 밟히는 장면이 어린이들에게, 스포츠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진다는 게 말이 됩니까? 
머리 때리지 말고 발로 차지 말고 등을 두드려주거나 손바닥을 마주치는 하이파이브가 얼마나 멋있습니까!
메이저리그나 일본야구에서는 물벼락에 얼음, 호수에 맥주까지 퍼붓고 크림파이나 케이크를 짜릿한 승리 주역의 선수 얼굴에 문지르는 세리머니에, 가끔은 미녀 리포터가 곁들여 봉변을 당하는 사례는 익숙하게 일어납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 프로야구에 스며들어 하나의 야구장 문화가 됐고 세리머니가 된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과격한 세리머니는 수훈 선수가 뜻하지 않은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덩달아 곁에 있던 리포터들이 수난을 겪을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좋으냐, 나쁘냐는 문제는 오로지 이 장면을 보는 팬들이, 시청자들이 판단할 사안입니다. 선수들이 친근감을 갖고 장난을 했다고해도 그들이 선택할, 좋아할 축하 행사가 아닙니다.
또 이 같은 모습에 대한 거부감이나 배척은 방송사 관계자들보다 시청자나 팬들이 결정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OSEN 편집인 chunip@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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