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프로야구 난투사](22)부산 관중들, 외야 출입구 파괴→무동 타기, 빗속의 ‘쇼쇼쇼’ 대행진
OSEN 홍윤표 기자
발행 2013.06.04 08: 20

1992년은 롯데 자이언츠가 ‘돌아온 덕장’ 강병철 감독의 지휘로 1984년 이후 8년 만에 한국시리즈 패권을 되찾은 해였다. 롯데의 성적이 좋다보니 부산 사직구장은 프로야구 경기가 있는 날이면  관중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해 롯데는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8개 구단 가운데 최다인 120만 관중을 돌파했다. 그 수치는 같은 해 서울 두 구단(LG+두산)의 관중수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사직구장 게임당 평균관중수가 2만 명에 육박했다(1만 9201명). 정규시즌에서 모두 11차례나 매진사례를 내걸었고, 포스트시즌 들어서도 5게임 모두 관중이 꽉꽉 들어찼다. 특히 6월14일부터 7월7일 사이에 7게임 연속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활황세였다.
성적이 오르면서 관중들도 부쩍 늘어나 사직구장은 매 경기마다 표구하기 전쟁이었다. 3만 154석의 모든 표가 다 팔리고 난 다음에도 사직구장 밖에서는 표를 구하지 못한 군중들의 아우성으로 난리를 치러야했다. 그예 사단이 벌어졌다.

1992년 6월 12일, 금요일 외야 출입구 파괴 사건
해태 타이거즈와의 시즌 10차전을 앞두고 사직구장 주변은 인산인해, 말 그대로 사람바다였다. 평일인데도 표는 일찌감치 다 팔렸다. 경기장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틈새를 노리고 있었다.
외야석으로 들어가는, 구장 왼쪽 매표소 옆 출입구에는 표를 끊고도 미처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과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한데 뒤엉켜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롯데 구단은 한꺼번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철망을 밀어대자 사고를 우려해 드나드는 쪽문을 열었다 닫았다하며 관중들을 구장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 가운데는 표가 없는 관중도 있었다.
워낙 많은 관중이 몰리다보니 그런 수단도 한계가 있었다. 경기가 임박해오자 사람들이 무력을 쓰기 시작했다. 출입문이 달려 있는 철망을 여러 사람이 흔들며 밀어댄 것이다. 급기야 철망이 넘어지고 말았다. 우르르 구장 외야로 쏟아져 들어간 팬들은 밑에서 사람 두 길이 넘는 스탠드로 올라가려고 난리를 쳤다.
‘사람 사다리’를 만들어 밑에서 무동을 태우거나 엉덩이를 받쳐 올리면 위에서 손을 잡고 끌어올리는 위태로운 광경이 한동안 연출됐다. 관중들끼리 ‘상부상조’하며 벌이는 그같은 곡예는 그 시절 사직구장에서 다반사로 볼 수 있었다. 
롯데 구단 단장을 역임했던 이상구 전 NC 다이노스 부사장(당시 롯데구단 기획부장)의 증언이다.
“서울사무소에서 근무할 때였는데, 그날 마침 사직구장에서 그 장면을 지켜봤다. 관중들이 외야 출입 쪽문 바깥에서 철문을 밀어 넘어뜨리고 쏟아져 들어왔다. 외야 철문은 매표소를 간이로 증설하면서 만든 것인데 하도 관중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사고가 날까 염려해 경기 전에 몇 차례 쪽문을 열어 관중들을 공짜로 넣어줬다. 나중에는 결국 그 철문을 밀어 넘어뜨리고 들어온 것이다. 그 무렵에는 담을 넘어 높은 데서 게걸음을 치며 들어오는 관중도 있어 혹시나 떨어져 다칠까봐 잘 들어오도록 유도한 적도 있다. 표 없이 들어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우선 안전사고가 날까봐 검표요원들이 오히려 끌어올려주는 일도 있었다.”
강병철 전 롯데 감독은 “관중들이 철문을 밀고 들어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때는 그런 식으로 관중들이 밀고 들어오는 일이 많이 일어났다.” 고 회상했다.
염종석이 완투했던 그 경기는 해태가 이호성의 홈런 등으로 7-4로 이겼다. 
오심시비…강우 콜드게임 패 전, 후 관중 소동
1992년 6월 18일(목요일) 빙그레 이글스와 롯데의 시즌 12차전이 열린 사직구장에는 발 디딜 틈도 없으리만치 관중들로 꽉 들이찼다.
경기는 롯데가 염종석, 빙그레는 송진우를 내세운 가운데 투수전으로 흘렀다. 결과는 완투 맞대결 끝에 빙그레가 4-2로 역전승했다. 롯데가 1회 말에 박정태의 적시타로 1-0으로 앞서나갔으나 7회 초 빙그레에 4점을 내줬다. 그 과정에서 이강돈의 세이프 판정에 대한 오심시비가 일어 강병철 감독이 항의하는 장면이 있었다.
때 마침 폭우가 쏟아졌다. 관중 몇 명이 그라운드로 뛰어들어 심판 판정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한 관중은 이강돈의 경기장면을 흉내 내며 판정이 잘 못됐다고 몸을 써가면서 ‘쇼’를 해보였다. 그는 홈플레이트 부근에 덮어놓은 방수포 위에 미끄러지기도 했다. 청원경찰들이 뛰어나와 관중들의 옆구리나 어깨 죽지를 잡고 그라운드 밖으로 끌어냈다. 
경기는 결국 2-4로 롯데가 졌다. 롯데는 그해 정규리그 1위였던 빙그레에 그 경기까지 3승 9패로 열세를 보였다. 관중들이 그냥 넘어갈리 없었다. 경기 후 관중들은 사직구장 정문 밖에 진을 치고 심판 판정에 항의하며 경찰과 1시간 이상 대치했다.
 
 
✍그런저런 관중 소란과 소요를 심하게 겪으며 몸살을 앓았던 롯데는 그해 기적 같은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궈냈다. 정규리그 3위로 가을잔치에 나간 롯데는 준플레이오프(삼성, 2승)와 플레이오프(해태, 3승 2패)를 통과, 한국시리즈에서 빙그레를 상대로 4승 1패로 정상에 다시 올랐다. 정규리그 3위 팀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데 대해 당시 매스컴은 ‘기적’, ‘한국 프로야구사의 대이변’, ‘제도적 모순이 낳은 기형’ 등으로 묘사했다. 
사실 롯데로선 빙그레와의 최종 승부보다는 해태와의 플레이오프가 가장 험난한 고비였다. 다행히도 해태가 ‘보도(寶刀)’ 선동렬이 부상으로 도저히 던질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 롯데로선 행운이었다고나 할까.
선동렬은 선수생활 통틀어 1992년의 성적이 가장 좋지 않았다. 4월 11일에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치른 잠실경기에서 OB 베어스를 상대로 탈삼진 16개를 기록하며 투구 수 138개로 5-0 완봉승을 거두긴 했으나 뒤탈이 나버렸던 것이다. 오른쪽 어깨를 다친 선동렬은 그해 고작 11경기에 나가 32⅔이닝만 소화, 2승 8세이브에 그쳤다. 하지만 선동렬의 평균자책점이 0.28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만약 선동렬이 건재했다면 그해 프로야구 판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야 어쨌든 강병철 감독은 당시를 돌아보며 “선동렬이 괜히 덕 아웃에 앉아 있었지만 누구나 못 던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선수등록은 했지만 벤치에 그냥 있었다는 기억이 난다.”며 웃었다.
1984년, 38살 나이에 롯데를 처음으로 우승시켰던 강병철 감독은 다시 롯데로 돌아온 후 팀을 8년 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2루수 박정태, 외야수 전준호 등 신진 세력으로 세대교체를 성공적으로 해낸 결과였다. 
/홍윤표 OSEN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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