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의 클리닝타임]심판의 권위, 칼 아닌 저울에서 나온다
OSEN 김태우 기자
발행 2013.06.16 06: 22

법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가장 유명한 것이 정의의 여신상이다. 눈을 가린 이 정의의 여신은 한손에는 칼을, 한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다. 칼은 제재를, 저울은 다툼의 공정한 해결을 의미한다. 그런데 저울이 한 쪽으로 치우치면 문제가 생긴다. 칼의 힘이 중시되어도 마찬가지다. 최근 한국프로야구 심판을 둘러싼 논쟁도 이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기분이다.
15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LG와 넥센과의 경기에서는 큰 오심이 나왔다. 0-0으로 팽팽히 맞선 5회말 2사 만루였다. 박용택의 안타성 타구를 3루수 김민성이 멋지게 잡아냈고 곧이어 2루로 던졌다. 서건창이 2루 베이스를 밟아 이닝은 거기서 끝나는 듯 했다. 그러나 박근영 2루심은 세이프를 선언했다. 느린 그림에서는 명백한 아웃이었다. 오심이었다.
염경엽 넥센 감독을 비롯한 선수단이 항의했으나 이미 판정을 번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과론적으로 이 오심 하나는 경기 흐름을 완전히 가르는 폭탄이 됐다. 평소 모습과는 다르게 흥분했던 나이트는 5회에만 8점을 허용하며 무너졌다. 사실상 넥센은 거기서 수건을 던졌다. 그러나 이긴 LG도 승자의 기분을 만끽하지 못했다. 잠실구장의 모든 이들이 찜찜했던 하루였다.

문제를 부풀리는 음모론을 제기하고 싶지는 않다. 만약 어떠한 고의성이 있었다면 프로야구 존립 여부를 흔들 수 있는 일이다. 그저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믿고 싶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수많은 팬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신뢰가 무너졌다. 저울은 기울어졌고 검은색 심판복은 변색됐다. 그 저울과 심판복을 원상복구 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 노력은 공정의 결여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껏 우리는 그런 경우가 많지 않았다. 내부적으로는 오심을 인정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쉬쉬했다. 징계를 당하거나, 소리 소문 없이 2군에 다녀오거나, 고과에 반영되는 것이 전부였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면 심판의 권위가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최고의 베테랑 심판들이 모여 있다는 미국 메이저리그(MLB)에서도 오심은 나온다. 그러나 우리와 차이가 있다면 심판들의 태도다. 퇴장 명령에 전혀 인색하지 않은 그 완고한 심판들도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넘어가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 사과가 심판의 권위를 해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합리적인 ‘저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감을 심어준다.
2010년 1루에서 세이프 판정으로 아만도 갈라라가의 퍼펙트 게임을 날린 짐 조이스는 경기 후 리플레이를 보면서 곧바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대기록을 놓친 갈라라가에게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다. 판관으로서 나약해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이스에 대한 권위는 변함이 없었다. 사건이 터진 직후, 메이저리그 선수 100명을 대상으로 실시된 ESPN의 ‘최고 심판’ 투표에서 조이스는 53%의 득표로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형평성에도 부합한다. 올 시즌 만해도 ‘심판의 권위’에 도전한 두 명의 선수(홍성흔 김병현)가 차례로 징계를 당했다. 선수와 구단의 사과도 받았다. 그에 상응하는 심판들의 사과가 있어야 그 또한 공정한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팬들과 선수들의 시선에는 칼만 보일 수밖에 없다. 칼로 만든 권위는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불만의 대상이 될 뿐이다.
2011년 6월 8일 잠실 한화-LG전에서 있었던 ‘임찬규 보크 오심 사건’ 당시(공교롭게도 당시 주심 역시 박근영 심판위원이었다) 심판위원들은 경기 다음날 한대화 당시 한화 감독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한 감독도 따뜻하게 받아들였다. 제소까지 고려했던 한화도 한발 물러섰다. 사태를 일단락시킨 것은 당시 심판조에게 내려진 9경기 출장 정지가 아니었다. 심판들의 진심 어린 사과였다. 그 후 선수들이 당시 심판조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정황은 없었다. 
당시 현장에서 들었던 생각은 '차라리 사과가 경기 후 곧바로 이뤄졌으면 어땠을까'였다. 경기 후 한국야구위원회(KBO)의 징계가 결정되고 심판들이 사과할 때까지의 시간은 반나절 남짓이었다. "퇴장은 순식간에 이뤄지면서도 사과는 반나절이 걸린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한 번쯤은 생각해 볼만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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