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명이 뛰는 팀이 어떻게 정상적인 경기를 할까?’
한국여자농구가 위기에 빠졌다. 지난 14일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제49회 쌍용기 전국남녀고교농구대회 결승전이 열렸다. 올 시즌 고교농구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팀들이 붙는 왕중왕 전이었다. 여고부에서 인성여고가 선일여고를 72-59로 제압하고 시즌 3관왕을 차지했다. MVP 김희진은 17점, 14리바운드로 맹활약했다. 인성여고는 전원이 압박수비에 가담하는 막강한 조직력이 빛났다.
그런데 이긴 인성여고 선수들에게서 미안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단순히 승패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정당당하게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일여고는 농구부가 단 5명으로 구성돼 있다. 인성여고의 딱 절반이다. 그나마 5명 중 4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안고 있었다. 결국 1쿼터에 사건이 터졌다. 원래부터 발등이 좋지 않던 선일여고 김선희가 부상으로 벤치로 물러난 것.

선일여고는 하는 수없이 4명으로 경기를 속개했다. 농구규정에 따르면 선수 3명이 남을 때까지 5-3으로 경기를 치를 수는 있다. 다만 농구는 한 명만 빠져도 타격이 대단히 크다. 누군가 한 명은 무조건 노마크 찬스를 얻기 때문. 선일여고의 에이스 신지현은 무려 3명의 집중수비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신지현은 홀로 리바운드를 따내서 레이업슛까지 넣는 등 21점으로 최선을 다했다.

▲ 서울명문팀에도 선수가 없다!
선일여고 농구부는 1972년 창단된 여자농구 최고의 명문이다. 서울에 있는데다 선일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에 모두 농구부가 있다. 농구코트 3면이 나란히 붙어있는 체육관 시설도 좋다. 전주원 우리은행 코치, 이경은(26, KDB생명) 등 스타의 산실이다. 그런 명문교에 선수가 부족해 4명이 뛰었다. 단순히 ‘부상투혼’ 미담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이는 한국농구 전체의 위기로 봐야 한다.
36년째 선일여고를 지키고 있는 황신철 코치는 “선수수급이 어렵다. 대부분 선수가 많아봐야 7-8명이다. 12명 엔트리를 다 채운 팀이 전국에 3팀뿐이다. 요즘 학생들에게 공부를 강조하다보니 운동을 안 시킨다. 다 프로를 간다고 볼 수도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선수가 없다보니 농구부를 해체시키는 학교도 속속 나오고 있다. 그나마 있는 우수선수를 두고 스카우트 쟁탈전도 심화되고 있다. 연계학교로 진학시키는 개념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원래 선수가 많았던 선일여고는 많은 선수들이 다른 학교로 적을 옮겼다.
황 코치는 “우리학교에 오겠다는 선수는 많지만 남의 선수는 키우고 싶지 않다. 본교생을 잘 키워야 한다. 이경은, 전주원 다 우리 초등학교에서 나온 선수들이다. 그런 영향력이 힘이 된다. 타 학교선수를 받아주면 결국 그 학교농구부는 없어진다”고 지적했다.
한 학부모에 의하면 자녀들의 출장시간을 두고 부모들의 ‘치맛바람’도 매우 거세다고 한다. 특히 저학년선수가 주전자리를 꿰찰 경우 고학년선수 부모가 반발해 팀을 옮기는 경우도 있다. 신생팀이 즉시 성적을 내려면 타 팀 우수선수를 빼올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스카우트 질서가 무너지고 있는 것.

▲ 청소년농구는 이미 일본에 뒤쳐진지 오래
운동을 경시하고 공부를 중요시하는 최근 사회풍조도 위기의 원인이다. 황신철 코치는 “요즘 학생들에게 공부를 강조하다보니 운동을 안 시킨다. 프로를 다 간다고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설령 프로에 가도 살아남는 선수는 10명 중 1~2명”이라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나라 농구가 퇴보되는 사이 아시아라이벌 중국과 일본은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원체 신체조건이 뛰어난 중국은 인구가 많고 농구인기도 높다. 최근 중국프로리그는 김영옥, 정선민 등 우리나라 스타선수들까지 영입해 열기를 더하고 있다. 일본은 탄탄한 저변에 막대한 투자가 어우러지고 있다.
황 코치는 “일본과 비교해서 실력 차가 많이 난다. 우리나라는 고등학교가 20개 팀이다. 반면 일본은 팀이 몇 천 개나 있다. 기본기도 훨씬 좋다. 이미 중학교부터 일본과 붙으면 상대가 안 된다. 지금까지 성인대표 기량으로 버텼는데 앞으로는 어렵다고 본다”며 비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 여대부 창단 등 저변확대 힘써야
대한농구협회에서도 여자농구의 얕은 저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대한농구협회 김갑선 사무국장은 “과거에는 초중고팀이 굉장히 많았다. 서울만 해도 10개 팀이 있었지만 3개만 남았다. 지금 여자농구 장래성이 약하기 때문에 학부모들이 농구를 기피한다. 굉장히 큰 문제다. 개선시키려 애를 쓰고 있다”며 문제의식에 공감했다.
이제 엘리트체육 위주의 선수육성은 한계가 있다. 미국체육협회(NCAA)처럼 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는 시스템이 자리를 잡아야 한다. 이를 위해 남자농구부를 보유한 대학과 여자대학의 여자농구부 창단이 시급한 상황.
김 국장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여자대학팀 창단이 시급하다. 프로팀의 숫자를 늘리고, 여자실업팀에서 은퇴 후 직장생활까지 할 수 있는 방향이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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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학생체=민경훈 기자 rumi@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