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김응룡(72) 감독이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지난 25일 6·25 전쟁 발발 63주년을 맞아 백발이 성한 김응룡 감독은 6·25 전쟁 참전 용사 관련 방송 프로그램을 보곤 까마득한 옛기억을 더듬었다.
김 감독은 평안남도 평원군 검산면 송양리가 고향이다. 평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났고, 10살이었던 김 감독은 1951년 1.4 후퇴 때 아버지와 큰 누나의 손에 이끌려 함께 남한으로 피난했다. 나머지 가족들과는 예고없는 생이별이었다.
김 감독은 직접 손가락을 새어가며 "할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3명이랑 작은 누나 그리고 형까지 8명이나 헤어졌다. 그 이후로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어떻게 됐는지 소식도 못 들었다. 여러 번 알아봤는데도 그게 잘 안 되더라"며 애끓는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피난길에 오른 김 감독 가족이 임시 거처로 머물렀던 곳이 바로 계룡산. 김 감독은 요즘도 계룡산을 가끔 찾는다. 김 감독은 "계룡산이 정감록에서 가장 숨기 좋은 곳이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런데 전쟁이 계속되는 바람에 다시 보따리 싸서 부산까지 내려가야 했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부산 국제시장에 터를 마련했다.
부산에서 김 감독은 야구인와 인연을 맺었다. 김 감독은 "북한에서는 동네에서 축구만 했다. 새끼줄을 꿰매서 만든 공으로 축구를 했었다"며 떠올린 뒤 "부산에서도 처음에는 축구-피구를 했는데 덩치가 크다는 이유로 못 나가게 했다. 개성중 1학년 때 체육시간에 야구를 처음했는데 투수를 했다. 그때 3학년 야구부 주장이 '너 이제 야구해'라고 해서 야구를 시작하게 된 것"이라고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나 여전히 북한에 남겨둔 가족들을 못 만난 건 지금도 가슴 속 응어리로 남아있다. "이상하게 다른 것들은 기억이 나는데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한 김 감독은 해태 감독 시절부터 백방으로 가족들의 행방을 알아봤지만 돌아오는 건 무소식이나 사기꾼들의 거짓말이었다.
김 감독은 삼성 사장 시절이었던 지난 2007년 대한적십자사와 함께 북한 평양에 3박4일 일정으로 방문한 바 있다. "예전에는 걸어서 반나절 걸리는 거리를 차로 지나갔다. 워낙 시골이었고 지금은 마을이 없어진 것 같더라"고 기억을 더듬은 김 감독은 "또 갈 기회가 있을까?"라며 상념에 잠겼다. 6·25 전쟁 실향민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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