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과 현대캐피탈의 맞대결이 펼쳐진 23일 안산상록수체육관. 경기장을 찾은 팬들은 1세트 무기력하게 패한 현대캐피탈의 모습에 대한항공의 완승을 예감했다. 아마 대한항공 선수들도 조금쯤은 마음을 놓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주포 문성민이 십자인대 파열로 빠진 현대캐피탈의 공격력은 분명 약했다.
하지만 객관적인 전력에서도, 경기의 분위기에서도 현대캐피탈의 셧아웃 완패를 예상했던 사람들은 이날 한 명의 리베로가 경기를 어떻게 바꿔놓는지 목격했다. 주인공은 현대캐피탈의 리베로 여오현(35)이었다.
여오현은 자신의 현대캐피탈 데뷔전이 된 이날 경기서 특유의 명품수비를 선보였다. 1세트를 16-25를 허무하게 내준 현대캐피탈이 2세트 분위기를 반전시키며 25-21로 경기를 원점으로 돌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도 여오현에게 있었다.

여오현은 2세트 10-8로 앞서나가던 상황에서 신영수의 날카로운 서브를 침착하게 받아냈다. 서브 에이스가 됐어도 이상하지 않을 좋은 서브였다. 여오현이 살린 공은 랠리로 이어졌고, 몇 번의 랠리를 거쳐 다시 한 번 신영수의 백어택으로 돌아왔다.
신영수의 백어택은 임동규와 박주형을 거쳐 관중석 쪽으로 크게 튀어올랐다. 대한항공 선수들은 공격 성공을 예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으나 바로 이 때 경기의 분위기를 바꾸는 여오현의 명품 수비가 나왔다. 여오현이 튀어오른 공의 방향을 쫓으며 경기장의 A보드를 밟고 그대로 공을 건져올려 넘긴 것.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공을 건져낸 여오현의 수비에 경기를 지켜보던 팬은 물론 선수들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여오현의 맹활약에 힘입어 랠리는 계속 이어졌고, 곽승석의 오픈이 공격 범실로 연결되며 현대캐피탈이 11-8로 한점을 더 달아났다. 이날 파란의 풀세트를 예고하는 '결정적 장면'이자 여오현의 가세로 달라진 현대캐피탈의 수비집중력을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13년 동안 삼성화재 한 팀에서 뛰며 '수호신'으로 군림했던 여오현은 2012-2013시즌이 끝난 후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취득하고 현대캐피탈로 이적했다. 팀의 수비력을 강화하고 'V리그 최강' 삼성화재의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강수였다. '월드리베로' 여오현의 검증된 실력에 더해 어린 선수들이 많은 현대캐피탈에 도움이 될 것이란 판단도 있었다.
경기 후 김호철 감독도 "여오현의 가세로 우리 선수들이 긍정적인 마인드로 바뀌어가고 있다. 수비면에서도 그렇고 팀을 이끌어가는 전체적인 리더십도 만족스럽다. 우리 팀은 어린 선수들이 많아 고질적인 병을 가지고 있는데 그 병을 낫게하는데 있어 가장 믿음직스러운 선수가 아닌가 싶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완패의 양상으로 흘러가던 경기에 숨통을 틔우며 반전의 향기를 불어넣은 여오현의 '명품수비'는 올 시즌 현대캐피탈의 또 하나의 강점이 될 듯하다. 문성민의 복귀가 언제가 될 지 알 수 없어 시즌 초반 고전은 피할 수 없겠지만, 여오현의 명품수비에 용병 아가메스가 제 몫의 활약만 해준다면 현대캐피탈의 앞날도 썩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costball@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