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경(25) 앞에 두 가지 길이 놓였다. 하나는 흥국생명과 화해하고 선수생활을 지속하는 것, 하나는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고 코트에서 멀어지는 것. 처음에는 가짓수가 더 많았지만, 적어도 지금 그의 앞에 놓인 것은 이 두 가지 길 뿐이다.
한국배구연맹(KOVO)은 23일 서울 마포구 KOVO 대회의실에서 상벌위원회를 열고 김연경이 임의탈퇴공시에 대해 KOVO규약에 근거하여 제기한 이의신청을 기각했다. 김광호 상벌위원장은 "KOVO의 김연경 임의탈퇴공시는 적합하다고 판단했으며 이에 이의신청을 기각한다"고 결론을 지었다.
상벌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열렸지만 이날 소집된 위원회는 성격이 약간 달랐다. KOVO 측은 "이번 위원회는 김연경이 임의탈퇴공시에 대해 이의신청을 제기함에 따라 KOVO 제규정에 위반됨이 없는지를 심의하는 차원에서 개최한 것"이라고 미리 못을 박았다. 이를 위해 배구원로인 김 위원장과 장달영 변호사(법무법인 에이펙스), 송대근 스포츠동아 대표이사, 이유성 대한항공 단장, 황명석 심판위원장, 신원호 사무총장이 참석해 김연경이 질의한 내용에 대해 심사숙고했다.

약 두 시간에 걸친 상벌위원회의 결과는 지금까지 KOVO의 입장과 큰 변화가 없었다. 김 위원장은 "그러나 김연경이 FA자격취득요건인 정규리그 6시즌 출장 요건을 취득하지 못하여 흥국생명과 계약을 체결할 의무가 있음에도 이를 거부하고 연맹 FA 규정을 위반했다. 이에 임의탈퇴공시가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본 건의 이의신청을 기각한다"고 최종적인 결론을 내렸다. 대신 "김연경이라는 스타 선수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흥국생명 측과 원만한 합의를 통해 해결할 것을 권한다"고 덧붙였다.
김연경은 결과가 나오기 전에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으리라고 예상했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오늘 상벌위원회의 공정한 판단을 기대했으나 자리에 앉자마자 강압적인 어조로 시작됐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변호사를 동석시켰지만 시작과 동시에 나가라고 하고 자료도 보지 못하게 했다는 것. 이날 상벌위원회 심의 과정은 언론에 비공개로 진행돼 진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김연경의 마음이 크게 상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제 김연경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또 하나 줄어들었다는 점에 있다. 김연경은 현재 국내 FA 규정을 채우지 못해 한국 무대에서는 FA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규정은 해외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며 국제배구연맹(FIVB)의 규정에 따라 자유롭게 뛸 수 있도록 국제이적동의서(ITC)를 발급해달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배구연맹과 대한배구협회 모두 소속구단의 동의가 먼저라는 FIVB의 규정을 들어 흥국생명과 합의를 봐야 ITC 발급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FIVB가 이미 지난 10월과 올해 4월, 두 차례 공문을 보내 김연경의 소속구단을 흥국생명으로 규정했으며 김연경과 흥국생명, 배구협회 삼자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권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년 동안 갈등을 계속해오면서 감정의 골이 깊어질대로 깊어진 상황이다. 김연경이 순순히 머리를 숙이고 흥국생명 소속임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국가대표 은퇴라는 비장의 카드까지 꺼내들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김연경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더욱 줄어들었다.
팬들은 김연경에게 귀화를 제시하고 있지만 FIVB 규정에 의하면 그마저도 쉽지 않다. FIVB의 스포츠규정(Sports Regulation) 44조 2-1항은 "국적이나 소속 협회를 바꾼 선수는 최소 그 나라에서 2년 이상 거주해야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또한 김연경과 에이전트 측이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는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 제소나 법정 싸움으로 끌고가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FIVB 규정에 따르면 재정문제 이외의 민사소송으로는 CAS 제소가 불가능하고, 구단과 선수가 FIVB 동의 없이 분쟁을 민사소송으로 진행할 경우 양측 모두 제재한다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결국 김연경에게 남은 길은 두 가지뿐이다. 흥국생명 소속임을 인정하고 임대 신분으로 해외에서 뛰거나, 혹은 코트에서 멀어지거나다. ITC를 발급받지 못하면 터키 무대에서 뛸 수 없고, 국내무대에서는 임의탈퇴된 상황이라 무적 상태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연경 본인에게도, 그를 지켜보는 팬들에게도 가장 가혹한 결론이자 피해야 할 길이다.
결국 어느 쪽이든 실타래를 풀어야할 주인공은 김연경이다. 더 잘 해결될 수도 있었던 문제였지만, 1년을 끌고 오는 동안 상처는 곪아 쉽게 짜낼 수 없게 됐다. '해피엔딩'은 어렵다하더라도, 1년 동안 치열하게 계속되어 온 '김연경 사태'를 끝내는 것은 부메랑처럼 김연경 본인의 몫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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