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웅의 야구 기록과 기록 사이]타격왕 싸움을 혼전으로 몰아넣은 규정타석 규정
OSEN 홍윤표 기자
발행 2013.08.01 09: 52

한 마디로 암중모색(暗中摸索)이요,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2013 타격왕을 향한 후보 타자들의 경쟁이 물 위는 물론 수면 아래로까지 번져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과거 수위타자 자리를 놓고 후보들간의 뜨거운 공방이 벌어진 적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마치 몸을 숨긴 맹수가 먹이를 노리듯 형체를 드러내지 않는 존재까지 그 가능성을 계산에 넣어야 하는 올해와 같은 복잡한 상황은 거의 초유의 일이다.
우선 수면위의 상황. 한동안 수위타자 경쟁에서 선두를 달리던 최정(SK)을 기어이 따라잡은 손아섭(롯데)이 타격왕 레이스를 끌어가는가싶었는데 어느새 박용택(LG)이 앞질렀다. 
여기에 NC의 모창민은 7월 30일규정타석을 채우면서 단번에 3위로 입성, 두산의 이종욱과 함께 그 뒷덜미를 위협하더니, 급기야 다음날인 31일에는 삼성 채태인이 역시 부족했던 규정타석 수를 메우면서 3할 7푼대의 고공 타율로 3할 2~3푼대의 후보 모두를 밀어내고 일약 1위 자리를 꿰차고 앉는 일이 벌어졌다.

채태인과 나머지 타자들의 타율 격차를 감안하면 당분간 채태인의 독주가 예상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오밀조밀하던 타격왕 다툼은 대충 일단락된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수면 아래의기록을 들여다보면 답은 부정적이다. ‘뛰는 자 위에 나는 자 있다’고, 채태인보다 상대적으로 더 높거나 그에 필적할 만한 고타율을 기록 중인 타자들이 물 밑에서 여럿 대기 중이다. 올시즌 돌풍을 일으키며 만 10년만의 포스트진출 가능성을 높여가고 있는 LG의 ‘적토마’ 이병규가 3할 9푼대, 같은 팀의 이진영과 KIA 신종길이 각각 3할 5푼대의 높은 타율로 잠망경을 통해 수면 위를 살피고 있기 때문이다.
현 상황에서타격 1위를 예상한다는 것은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짙은 안개와 어둠 속에서 길이나 물건을 찾는 것과 다름이 없다. 신데렐라처럼 하루 아침에 꼭대기에 오른 채태인과 타율 장외 1위 이병규가 남은 시즌을 고타율로 마친다는 것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고, 이들외의 경쟁자들 중에서 누가 갑자기 치고 나와 선두권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남은 시즌이 길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 타격 1위 채태인이 가장 경계해야 할 타자들은 장내가 아닌 이병규를 비롯한 장외의 고타율 후보들이라고 좁혀 생각해볼 수는 있겠다.
그러면 순위에도 들어있지 않은 이들이 타격왕 자리를 위협하는 상황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것일까?
그것은 ‘규정타석’이라는 기준 규정에 기인한다. 규정타석은 소속 팀이 치른 경기수에 통상 3.1을 곱한 수를 기준으로 산정(퓨처스리그는 경기수 X 2.7)한다. 9이닝을 기준으로 야수가 타석에 들어설 수 있는 최소한의 타석수가 3번이라는 것에서 착안해 만든 기준선이다.
퓨처스리그를 조금 낮게 잡은 것은 리그 운영목적상 보다 많은 선수들에게 기회의 장을 마련해 줄 필요가 있기 때문으로 돌려 해석해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기준은 리그 운영의 목적과 형편에 따라 얼마든지 수치의 가감이 자유로운 편이다.
한편 타자들의 타격부문 순위를 정할 때 이 규정타석은 그 자격을 논하는 기준이 되고 있는데, 순위를 매김에 있어 규정타석을 정해 놓은 실질적 이유는 단순히 랭킹 진입 자격부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타자들의 타격기록이 신빙성을 갖는데 필요한 일정량 이상의 기회수를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면, 팀당 128경기를 치르게 되는 올 시즌 한국프로야구의 규정타석 수는 최소 396타석(정확히는 396.8 타석이지만 소수점 이하 자리는 버린다) 이상이다.
즉 그정도의 타석수는 충족되어야 해당 선수의 시즌 기록이 운이 아닌 실력임을 반증하는 지표로서 활용 가능하다는 얘기로, 규칙에서는 이를 균일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1년동안 10타수 8안타를 친 8할 타자의 기록을 실력이라고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이유와 같다.
그같은 이유로 타격 순위를 따질 때 규정타석을 넘고 못 넘고를 가지고 그 순위를 따지면 판단은 아주 간단명료해진다. 하지만 야구규칙 10.23은 올 시즌과 같은 혼전양상을 낳게 만든 하나의 예외 조항을 별도로 두고 있는데, 바로 다음의 내용이다.
‘필요 타석수에 미달한 타자가 그 부족분을 타수로 가산하고도 최고의 타율, 장타율 및 출루율을 나타냈을 경우에는 그 타자에게 상을 수여한다.’
시즌이 끝났을 때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한 타자가 그 부족한 타석을 모두 범타로 물러났다고 가정해 타율을 계산한 뒤 그래도 랭킹에 올라있는 타격 1위 선수보다 타율이 높게 나왔을 경우, 그 타자를 타격 1위로 인정한다는 얘기다. (단, 가정해본 결과 1위가 되었을 때에만 적용되며 2위 이하의 순위에 해당되었을 경우에는 타격순위에 반영하지 않는다)
현재 3할 9푼대의 최고 타율을 기록하고 있지만 초반 장기결장에 발목이 잡혀 규정타석 부족(현 211타석)으로 랭킹에 포함되지 않고 있는 LG 이병규가 규정타석을 채우려면, 남은 시즌 거의 교체 없이 풀 타임 출장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이진영(227타석)과 신종길(204타석)은 이병규보다 조금 여유가 있는 편이지만 빡빡하기는 매 한가지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여기에 이들 3명의 후보군 타자들이 한가지 더 갖추어야 할 것은 높은 타율의 유지.
이미 카드를 오픈 한 채태인을 비롯한 제도권 타자들과 히든 카드를 손에 쥔 장외권 타자들 중, 올 시즌이 끝났을때 마지막에 크게 웃는 타자는 과연 누구일는지.
1996년 메이저리그의 토니 그윈(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은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했지만 3할 5푼 3리의 타율로 순위표상 1위에 자리하고 있던 3할 4푼 4리의 엘리스 벅스(콜로라도로키스)를 밀어내고 타격왕을 강탈(?)한 사례가 역사에 기록되어있다.
당시 토니그윈은 규정타석인 502타석(162경기 기준)에 4타석 모자란 498타석으로시즌을 마쳤지만, 규정에 의거 부족한 4타석을 범타로 가산했을때의 타율이 3할 4푼 9리로나와 엘리스 벅스를 누를 수 있었다.
참고로 토니 그윈의 최종 타율이 규정타석 부족분을 반영한 3할 4푼 9리가 아닌 3할 5푼 3리라는 점은 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가정의 타율(.349)은 어디까지나 순위를 가르는 구분선으로 참고자료일 뿐이며, 선수의 기록은 실제 그가 기록한 타율( .353)이 공식기록으로 인정받는다.
한편 규정타석과 타격왕의 상관관계에 얽힌 아주 특이한 사연 하나가 지난해(2012) 메이저리그를 강타했는데, 선수의 타격왕 자진 반납 해프닝이 그것이다.
2012년 내셔널리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멜키 카브레라는 규정상 타격 1위에 오르고도 금지약물 복용 혐의로 50경기 출전정지를 받으며, 타격왕에 오를 기회를 손에서 스스로 내려 놓아야 했다. 시즌 45경기를 남겨 놓은 상태에서 50경기 출전정지를 당하기 전까지 카브레라는 3할 4푼 6리의 타율로 1위에 자리하고 있었고, 출전정지로 인해 남은 경기가 모두 결장처리 된다 하더라도 그는 규정타석에 불과 1타석만이 부족(501타석)한 상태였다.
따라서 그의 타율을 상회하는 타자가 등장하지 않는 이상, 타격왕은 당연 그의 몫으로 보였다.
하지만 사무국의 규정준수 의지에도 불구하고 반성의 의미로 멜키 카브레라는 스스로 ‘수위타자의 자격이 없다’고 자진 공표하고 나섰고, 결국 야구규칙 10.23의 규정타석과 타격왕 관계규정(메이저리그는 10.22)에 상관 없이 카브레라 보다 타율이 낮은 버스터 포지(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3할 3푼 6리의 저타율(?)로 타격왕을 대신(?) 차지하는 것으로 수위타자 해프닝은 그렇게 마무리 지어졌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
타격 1위로 불쑥 뒤쳐나온 채태인(정면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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