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구단 KT 위즈는 8월 2일 초대 사령탑으로 조범현(53) 삼성 인스트럭터를 낙점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계약기간 3년에 총액 15억 원의 조건입니다.
조범현 신임 감독은 충암고-인하대 출신으로 SK와 KIA에서 총 8년 간 지휘봉 잡은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로 무엇보다 팀을 만드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당초 KT 구단은 8월 중순 사령탑 인선을 발표한 예정이었으나 7월 31일~8월 1일 구단 자체 감독 선임 모임에서 전격 발탁된 조 감독이 팀을 구성하려면 시일이 촉박하다고 견해를 밝혀 빠르게 발표를 한 것입니다.

KT 스포츠 권사일 사장은 "조범현 감독은 지도자 경험이 풍부하며 선수육성 능력 및 시스템 구축 능력이 뛰어난 야전 사령관이다. 더불어 야구에 대한 창의적인 전략과 중장기적인 비전을 지닌 프로야구의 제갈량 같은 감독이다"고 선임 배경을 밝혔습니다.
김경문 감독은 2일 오후 마산 한화전을 앞두고 OSEN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친구로서 축하할 일이다. 좋은 팀으로 잘 만들어 함께 좋은 대결을 펼쳤으면 좋겠다"고 덕담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또 김경문 감독은 "신생팀은 이것저것 해야 할 게 많다. 감독 선임을 빠를수록 좋다"며 "KT의 가세로 선수들에게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점도 긍정적"이라는 말로 10구단 KT의 가세도 진심으로 반겼습니다.
조 감독이 현역에 복귀함에 따라 현재 현역으로 뛰는 김성근(71) 고양 원더스 감독과 김경문(55) NC 다이노스 감독, 이만수(55) SK 와이번스 감독이 1970년대 중반부터 이어온 인연이 새삼 떠오릅니다.
대구 출신으로 대건고 포수이던 조범현은 대건고 야구부가 해체된다는 이야기가 나돌자 동기생 몇 명과 함께 공주고로 전학을 갔습니다. 이미 공주고에는 나이는 두살이 많은 동급생 김경문이 포수로 자리를 잡고 있었고 몇달 후 조범현은 다시 대건고로 돌아왔다가 야구부가 결국 해체되자 다시 충암고로 전학을 갔습니다.
충암고는 그해 기업은행 감독과 국가대표 코치를 역임한 김성근(당시 34세) 감독을 영입해 팀을 강화 시키는 중이었고 다음 해 1977년 8월에 열린 제7회 봉황대기에서 우승을 팀 창단 9년만에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합니다.
충암고는 준결승서 서울고에 5-3으로 역전승을 거두고 결승전에서 광주 진흥고를 만나 기세봉이 6안타 무실점으로 최우수투수상을 받고 조범현 4회말 선제 2타점 적시타를 때려 5-0으로 영봉승을 올려 최우수선수상(MVP)를 수상했습니다.
결승전을 마치고 필자는 한국일보-일간스포츠 기자로 김성근 감독을 만났는데 “조범현이 투수들을 잘 리드하고 필요할 때 잘 때려줘 수훈을 세웠다”면서 “빠른 시일내 충암고가 전국대회 강자로 올라가도록 조범현, 기세봉, 정용락 등이 잘해줬다”고 선수들에게 공을 돌렸던 김 감독의 소감이 생각납니다.
당시 고교야구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그해는 뛰어난 포수들이 많았습니다. 공주고의 김경문은 그해 5월에 거행된 제11회 대통령배 결승전에서 부산고를 4-3으로 꺾고 충청도 팀 역사상 첫 우승을 올렸습니다.
김경문은 이 대회 최우수선수상과 타격상(15타수 7안타)을 받아 2관왕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6월에 열린 제32회 청룡기대회에서는 대구상고가 패자부활전을 거쳐 결승에서 동산고를 7-2로 제치고 우승을 했는데 이 대회에서 포수 이만수는 최우수선수상, 타격상, 최다안타상, 타점상 등 4관왕을 차지했습니다.
고교 졸업 후 조범현은 인하대로, 김경문은 고려대로, 이만수는 한양대로 진학했는데 한양대가 대학야구 정상급으로 대표 선수를 여러명 배출했습니다.

조범현과 김경문은 대학 졸업 후 1982년 막 출범한 OB 베어스에 입단해 또 다시 만나 둘다 수비형 포수로 주전 경쟁을 벌였고 이만수는 삼성에 입단해 공격형 포수로 최고의 타자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그러나 정규시즌에서는 화려한 멤버로 구성된 삼성의 이만수가 공격 부문에서 펄펄 날았지만 1982년 첫 코리안 시리즈에서 OB와 만나서는 삼성이 패하고 말았습니다.
김경문과 조범현은 당시 코리안시리즈에 출전해 선배 투수 박철순을 잘 보필했습니다.
한편 김성근 감독은 충암고를 거쳐 신일고 감독을 역임한 다음 OB에 투수코치로 일하고 1984년부터 1988년까지는 베어스 감독을 맡아 두 포수를 지도했습니다.
김경문은 1991년까지 OB에서 뛰다가 선수 유니폼을 벗었고 조범현은 삼성에 트레이드된 뒤 1992년에 은퇴했으며 이만수는 1997년까지 삼성에서 활약하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OB 감독 후 태평양에서 2년, 삼성에서 1991~1992년 사령탑을 맡기도 해 이만수를 지도하면서 홈런 세리머니를 지나치게 요란하게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조범현과 김경문은 지도자로 나선 시기도 비슷한데 조범현은 김성근 감독의 부름을 받아 1992년에 삼성의 배터리 코치로, 1993년부터 쌍방울 레이더스 배터리 코치로 일하며 사제의 인연을 이어갔습니다.
쌍방울이 부도 사태로 해체 후 삼성 코치로 돌아온 조범현은 2003년에 SK의 2대 사령탑으로 취임해 2006년 자진 사퇴 형식으로 그만 두었고 그 자리르 김성근 감독이 일본에서 돌아와 와이번스를 맡았습니다.
조범현은 2003년 SK의 한국시리즈 준우승으로 지도자 경력을 쌓아 2007년에 KIA 타이거즈 코치로 옮겼다가 그해 말 KIA의 사령탑에 부임했습니다.
그리고 2009년에 김상현을 LG에서 트레이드해 오면서 한국시리즈에 진출, 김성근 감독이 지휘한 SK와 맞붙어 나지완의 극적인 끝내기 홈런으로 우승, 감독 생활 이후 첫 영광을 맛보았습니다.
김경문은 선수 은퇴 후 미국 유학 중 친정팀 OB가 주니치에서 돌아온 선동렬을 감독으로 영입하려다 좌절되자 대타로 2004년에 두산 사령탑으로 부임해 두차례 스승 김성근 감독과 대결했습니다.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SK한테 2연승 후 4연패를 당했고 2008년에는 1승4패로 졌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SK에 부임하면서 미국에서 일하던 이만수 감독을 수석코치로 받아들이고 함께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2011년 8월 구단이 재계약 의사가 없는 것을 밝히자 구단과 충돌,전격 경질됐고 후임에 이만수 감독이 앉았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조범현 감독과는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김경문 감독과는 여러 차례 대결하면서 거침없는 성격대로 쓴소리를 하기도 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2008년 3월에는 베이징 올림픽 야구대표팀을 맡은 김경문 감독의 선수단 관리방식에 불만을 터뜨리며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습니다.
당시 대표팀에 참가한 SK의 정대현과 김광현 부상에 대해 대표팀 트레이너가 김성근 감독에게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는 전화를 하자 김성근 감독은 "트레이너가 전화할게 아니고 감독이 직접 전화를 해야 되는 것 아닌가. 그게 예의이고 매너인데 요즘 야구인들 사이에서는 선후배도 없어진 모양"이라며 질타했습니다.
어쨌든 베이징 올림픽에서 김경문 감독은 9전전승으로 기적의 금메달을 따내 한국야구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조범현 KT 감독은 2일 발표 후 “신생팀으로 9구단인 NC보다 혜택이 불리하다고 하지만 차분하게, 빠르게 팀을 구성해 좋은 성적을 내도록 시대에 맞는 야구를 전개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김성근 감독과 조범현, 김경문, 이만수 감독이 이제는 현장에서 자주 만나게 됐습니다. 사제지간의 이들이 앞으로 한국야구에 어떤 기여를 할 지 관심이 갑니다.
OSEN 편집인 chunip@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