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가 없는 빛은 없다. 조연이 없는 주연도 없다. 확 달라진 SK 불펜이 이를 증명해보이고 있다. 추격조의 희생이 필승조를 빛나게 하고 그렇게 합쳐진 힘이 반전의 물꼬를 트고 있다.
SK는 전반기 내내 불펜 문제로 고전했다. 몇몇 이유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전력의 빈 자리가 도드라졌다. 지난해 마무리로 맹활약했던 정우람이 군 입대했고 엄정욱은 재활로 올 시즌 내내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불펜 요원의 특별한 수혈도 없었다. 전력이 약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좋지 않은 성적에 투수 운영도 도마 위에 올랐다. 불펜 전체의 스트레스가 컸다.
그랬던 SK 불펜이 후반기 확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SK 불펜의 후반기 평균자책점은 3.08이다. 리그 최고의 불펜이라는 삼성(4.25)이나 LG(4.15)보다 나은 리그 2위에 해당되는 성적이다.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도 강해졌다. 후반기 들어 SK 불펜 투수 앞에 남겨진 주자는 총 27명이었다. SK 불펜 투수들은 이 중 5명에게만 홈을 허용했다. 18.5%의 비율이다. 리그 평균(27.9%)를 훨씬 밑도는 1위의 성적이다.

일단 박정배와 윤길현의 가세, 안정감을 찾은 진해수가 필승조를 이끌고 있는 것이 크다. 철벽 마무리로 진화 중인 박희수 앞에 쓸 수 있는 자원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추격조의 희생이다. 임경완 이재영 전유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악전고투하며 힘을 내고 있다. 달라진 SK의 불펜은 이들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사실 전반기 내내 어려운 경기를 펼쳤던 이들이다. 개개인의 성적만 놓고 보면 그렇게 뛰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숨겨진 팀 공헌도는 필승조 못지않다. 우선 세 선수는 하는 일이 많다. 아직 그런 경우는 없었지만 선발이 5이닝을 채우지 못하고 조기강판됐을 때 가장 먼저 적진에 뛰어드는 선수들이 이들이다. 일찍부터 몸을 풀어야 한다. 가뜩이나 무더운 날씨 속에서 몸을 푸는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체력소모를 감수해야 한다.
크게 이기고 있을 때도 이 선수들이 등장한다. 매 경기가 총력전인 SK로서는 필승조의 체력을 아껴야 하기 때문이다. 필승조가 나선다고 해도 이들이 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박빙의 상황으로 흐를 경우는 필승조는 투구수 관리 때문에 계속 마운드에 설 수 없다. 한계 투구수를 넘기면 그 다음부터는 추격조의 몫이다. 1인 3역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이만수 SK 감독도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못 나갈 때도 많다”며 안쓰러워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묵묵히 등판을 대비하고 있다. 최근 SK의 경기에서도 추격조의 활약이 좋다. 4일 문학 두산전에서는 지긴 했지만 임경완이 2이닝을 막았다. 연투에 부하가 걸린 필승조가 투입될 수 없는 상황에서 임경완이 마지막까지 불씨를 살렸다. 7일 청주 한화전에서는 점수차가 조금 벌어지자 선발 백인식에 이어 임경완(1⅓이닝)-전유수(1이닝)-이재영(1이닝)이 이어 던졌다. 이들이 경기를 마무리하는 동안 필승조는 하루의 휴식을 더 벌었다.
9일 목동 넥센전에서도 이재영의 활약이 빛났다. SK는 선발 세든이 5⅔이닝을 던지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동점 상황에서 윤길현(6회) 진해수(7회) 박정배(7회) 박희수(10회)라는 필승조가 줄줄이 마운드에 올랐다. 다음 경기를 위해 박희수는 아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11회 나설 필승조가 없었다. 그때 등장한 선수가 이재영이었다.
11회 마운드에 오른 이재영은 경기 끝까지 무실점으로 버텼다. 비록 승리를 거두진 못했지만 무승부라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재영의 덕이었다. 이재영의 이름 앞 결과에는 승도, 세이브도 붙지 않았지만 팀을 패배에서 구해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큰 역투였다. 이처럼 SK가 추격조의 희생 속에 아직은 마지막 남아있는 불씨를 간신히 지켜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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